한국일보

언덕에선 ‘이려, 이-려’ 소 모는 소리

2009-08-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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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 국토 종단기 <18> 충북 제천시 수산면

눈을 뜨니 아침이다. 냇가에 산책을 나갔다. 이 곳 이름이 멍청이 냇가란다. 이름이 재미있다. 이 근처 몇 집들이 민박을 한다고 했다. 주말에도 골짜기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고, 휴가철에는 가족단위로 오는 분들이 많아 민박 수요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오래 전 한국을 떠난 사람에게는 좀 생소한 모습일 수도 있겠지만, 걸어오면서 보니 관광지나 산수가 좋은 곳은 ‘민박’이라고 써 붙인 집들이 눈에 많이 보였다.


경운기 모는 아낙의 억척스러움과
고로쇠 수액 담아주는 따뜻한 마음
소담스런 민박 마을 발길 안떨어져

루시아 자매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올갱이들이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것을 보며 비가 올 것을 예상하고, 피라미나 구그리도 물이 불 때와 빠질 때의 움직임이 다르다고 했다. 깎아지른 ‘바위’에 붙어 있는 진달래가 큰물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살아남은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게 참 많다고도 했다. 그러고 보니 벼랑에 매달려 꽃을 피워낸 진달래 한 모둠이 유난히 붉다.

아침식사에 추어탕이 나왔다. 오래 전 먹어 보았던 딱 그 맛이다. 자매님이 얼린 고로쇠 물을 가방에 넣어준다. 고로쇠나무에서 얻은 수액인데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던 것이라 했다. 편한 잠자리, 맛있는 음식, 그리고 귀한 물까지 챙겨 받았다.

어제 그쳤던 곳에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무릎을 걱정했는데 괜찮다. 고개를 오르는데 얼굴에 망을 쓴 아저씨가 벌통에서 꿀을 따고 있다. ‘월악산 양봉원’ 간판이 길가에 보인다. 언덕을 넘어서니 수산면이다. 가파른 산비탈까지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있다. 2005년 LA 평통 방문단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개성 부근의 웬만한 산등성이를 모두 밭을 만들어 경작하던 풍경이 떠오른다.

자스락 마을을 지나는데 “이려, 이-려” 소 모는 소리가 들린다. 진안에서 본 이후, 두 번째 밭갈이 풍경이다. 저렇게 경사진 곳은 쟁기질로 밭갈이를 하는 수밖에 없을 성싶다. 아주머니가 비닐을 풀면서 밭둑을 따라 쟁기 뒤를 뒤따르고 있다. 고구마 둑 비닐 씌우기 작업이다. 쟁기질은 논밭을 갈아엎는 작업만 하는 줄 알았는데, 저런 일도 한다는 건 처음 알았다.

아주머니가 경운기를 몰고 가며 인사를 한다. 경운기는 자동차 운전과는 달리 어지간한 남정네도 힘든 일인데 아주머니가 참 대단하다. 저런 억척스러움이 세계적으로 최우수 그룹 골퍼가 겨루는 LPGA를 한국 낭자들이 주름잡게 하는지 모르겠다.

들판에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농기계 소리가 여기저기 들린다. 단양 쪽과 청풍 쪽으로 갈라지는 3거리다. 누군가 길은 본질적으로 흩어짐이라 했지만, 3거리에 서 보니 흩어지고 만남이 함께 한다는 말이 옳을 것 같다.

청풍 방향으로 걸어가다 길가 잔디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고로쇠 물병을 꺼내 목을 축인다. 반쯤 얼려 놓았으니 얼음이 녹을 만큼만 마시면 물에 체할 염려가 없을 것이라는 루시아 자매의 말이 떠 올린다.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주었다는 나주 부인의 얘기가 생각난다.


주위를 둘러보니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어있고, 보라색 제비꽃들도 앙증맞다. 밑동이 잘리어도 새순이 돋아나 꽃을 피워낸다. 보아주는 사람 없어도 저렇게 아름답게 핀다. 허긴, 꽃이 어디 사람을 위해 피고 진다더냐.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가볍게 흔들린다. 세상 모든 것들은 저렇게 흔들리며 피어나고 흔들리며 사라져 간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내 옆에 멈추더니 담배 한 대를 꺼내 문다. 수산에 사는 농부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천 평 정도 밭농사를 짓는데, 담배와 고추를 주로 심는다고 한다. 아들을 중국에 유학 보냈는데 뒷받침을 충분히 못해 주어 고생이 심할 거라며 아들 걱정이다. 광야에서 찬이슬 맞으며 걸어본 사람이 훗날 웃게 된다고, 내보낸 자식은 콩나무가 되고, 온실로 들여보낸 자식은 콩나물이 되지 않더냐고 위로를 건넸다.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는 농부의 옆얼굴을 보면서 문득, 어떤 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느 모임이 끝날 무렵 아이 때문에 귀가를 서두른다는 그 분에게 아이의 나이를 물었다. 열아홉 이라했다. 열아홉 살, 다 큰 아이인데 무슨 문제냐는 내 말에, 시각장애 아들이라고 무심히 흘러가듯 얘기하던 아버지의 그 옆얼굴. 가슴이 먹먹하여 나는 그 저녁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언덕에 오르니 잔디밭에 면장 공적비와 열사들의 묘비가 서있다. 주민들에게 칭송을 들을 만한 업적을 남겨 저렇게 오래오래 비문으로 남은 사람들, 그런 분들을 선정하여 기릴 줄 아는 이 지방 사람들의 역사에 대한 안목을 함께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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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농부가 아내와 함께 제법 가파른 산등성이에 만든 고구마 둑에 소를 몰며 비닐을 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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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의 한 양봉원에서 양봉업자가 꿀을 채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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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가 옆 커다란 바위틈에 피어난 진달래가 강인한 자연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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