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당신도 혹시 ‘초식남’ ‘건어물녀’

2009-08-0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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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트렌드 ‘신인류’ 들의 라이프 스타일

토끼 같은 남자와 마른 오징어 같은 여자가 만나면 어떻게 될까. 여자에는 별 관심 없는 남자와 역시나 연애에는 도통 관심 없는 여자들. 이름하여 초식남과 건어물녀가 최근 새로운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 이름만으로도 대충 감잡히는 이들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남의 눈치,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신인류의 직장인 버전인지도 모르겠다. 1990년대 초반 서태지의 출연과 함께 한국에서 사회적 담론으로까지 제기된 X세대(신인류)들이 성인이 돼 어느새 한국 사회의 중추가 됐지만 결혼과 연애에는 무관심한 채 그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 세대들에게는 도저히 납득 불가능한, 그러나 그 안에서 나름 질서와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초식남, 건어물녀의 라이프 스타일과 패션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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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무릎 나온 추리닝에 마른 오징어 안주를 곁들인 캔 맥주를 들고 집안을 뒹군다는 정의를 가진 ‘건어물녀’의 확실한 표본을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실감나게 보여줬던 최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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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못하는 남자’에서 초식남의 전형인 마흔 살 노총각을 연기하고 있는 지진희. 최근 그가 들고, 입고, 신고 나오는 모든 패션 아이템들이 한국 남성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전문직 X세대 미스터·미스들
결혼 관심 없고 자기만의 삶 영위
패션·문화·취미활동 투자 안아껴


■ 초식남이란

X와 Y세대를 넘어 코쿤 족, 오타쿠 족과 같은 무수히 많은 별별 ‘족’들이 명멸하고 난 뒤, 21세기 일부 남성들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육식을 과감히 버리고 초식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름하여 초식남이다. 초식남이란 얼마전 일본의 한 여성 칼럼니스트가 명명한 단어로 기존의 ‘남성다움’(육식)을 강하게 어필하지 않으면서, 주로 자신의 관심분야나 취미활동에는 적극적이나 이성과의 연애에는 소극적인 남성을 일컫는다고 한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보자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고, 혀 끌끌 차게 만들 이들이겠지만 그렇다고 이 초식남들이 나약함의 다른 이름은 결코 아니다. 자신의 분야에선 최고가 되기 위해 잠자는 시간도 반납하고 일에 매달리며, 좋아하는 취미를 위해서라면 집을 팔아서라도 기어코 ‘질러야’ 직성이 풀리는 돈키호테 같은 기질도 갖고 있다.

이 초식남의 모델은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의 조재희(지진희 분) 소장이다. 조 소장은 건축가라는 자신의 직업에선 자타공인 한국 최고지만 연애도 귀찮고, 친구도 귀찮아하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기질이 다분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한정판매 와인을 구입하기 위해 백화점 와인 코너에서 줄을 서고 와인을 손에 넣은 뒤 짓는 어린 아이 같은 웃음에 대한민국 여심이 깜빡 넘어가기도 할만큼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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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에서 지진희가 레스토랑에서 혼자 스테이크와 와인을 즐기고 있다.


■ 초식남 패션이 뜬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초식남은 라이프 스타일이 아닌 패션 스타일이다.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는 초식남 패션이라 함은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 속 지진희 스타일의 다른 이름이다. 극중 지진희가 초식남의 전형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그 남자의 딱 떨어지는 여름 패션이 남자들은 물론 그 남자들의 여자친구와 아내의 마음까지도 사로잡아 버린 것이다. 이름하여 보헤미안 댄디 룩이다.

바지 밑단을 한 단 접은 짤막한 느낌 나는 슬림한 팬츠에 적당한 근육을 딱 그만큼 적당하게 보여주는 피팅 좋은 셔츠나, 저지 소재 피켓 셔츠(칼러가 있는 셔츠. 일명 폴로셔츠)를 입고 맨발에 가죽 로퍼를 신은 뒤 빅백을 드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초식남 패션’은 몸매만 받쳐 준다면 연령 불문하고 20대에서부터 40대까지 적절하게 믹스 앤 매치해 입으면 입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 즐거울 수 있다.

만약 올 여름 초식남 패션을 위해 딱 한가지만 장만하고 싶다면 리넨과 면 혼방의 화이트 슬림 팬츠를 권하고 싶다. 사실 리넨 팬츠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 이는 리넨이라는 소재가 일반 팬츠보다 얇아서 속옷 관리가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닐뿐더러 관리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넨, 코튼 혼방 소재라면 구김도 덜 갈뿐더러 두께도 도톰한 편이어서 여름엔 세미 정장용 팬츠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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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ya Watanabe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새 트렌드‘신인류’들의 라이프 스타일

■ 건어물녀란

건어물녀란 출근할 때는 최신 유행 스타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코디해 나가지만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선 무릎 나온 ‘추리닝’(여기서 트레이닝 팬츠라는 세련된 표현은 가당치 않다)에 고무줄로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 유행 지난 안경을 쓰고 오징어 즉 건어물을 질겅질겅 씹으며 맥주 한 캔 벗삼아 TV나 DVD를 보면서 집안을 뒹구는 여자다. 여기에 ‘화장발’로 변신 내지는 둔갑했던 낮 동안의 ‘퍼펙트 페이스’는 최신 클렌저로 지워져 반쯤 남은 눈썹도 추가해야 할 듯 싶다. 주로 전문직종의 여성들 중에서 이 건어물녀들이 넘쳐난다고 하는데 이들은 워낙 일에 시달리다보니 아예 연애를 귀찮아하는 것은 물론 사교생활에도 취미를 잃어가면서 건어물처럼 바짝 마른 라이프 스타일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굳이 이 건어물녀의 ‘롤 모델’을 찾자면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에 출연했던 최강희를 꼽을 수 있겠다. 물론 드라마 속 그녀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건어물녀보다는 훨씬 세련된 라운지 웨어를 선보이지만 그래도 아무렇게나 입은 추리닝과 늘어진 면 티셔츠, 굵은 뿔테 안경 등이 건어물녀 정의에 가장 근접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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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어물녀를 위한 패션 제안

칵테일 드레스 10벌보다 실한 라운지 웨어 한 벌

사실 건어물녀 패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워낙 집밖에서는 ‘한 패션’ 하는 이들이 많기에 굳이 뭘 따라하고 말고 할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으니 바로 라운지 웨어(lounge wear)다. 라운지 웨어란 말 그대로 집에서 입는 옷인데 몇 년 전부터 이지 캐주얼 룩의 유행과 함께 이 라운지 웨어라는 것이 잠옷과 외출복의 중간이라는 어정쩡한 포지션에서 벗어나 간단한 외출복으로 입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패셔너블하게 재탄생하면서 할리웃 스타들을 포함한 캘리포니아 트렌드 세터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몇 년 전 위아래 합쳐 200달러가 훌쩍 넘는 고급 추리닝 패션으로 재미를 본 주시 쿠튀르를 선두로 캘리포니아 패션의 대표주자 하드테일(Hard Tail)과 제임스 펄스(James Perse) 역시 라운지 웨어로 최근까지도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이외에도 엘라 모스(Ella Moss), 베일리 44(BAILEY 44), 마이클 스타(Michael Stars), C&C, 아메리칸 빈티지 등도 트렌드 세터들에게 사랑 받는 라운지 웨어의 대표 브랜드들이다.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도 예외는 아니다. 도나 카렌은 꽤 오래 전부터 DKNY 퓨어(Pure)를 런칭해 그녀의 매니아들이 집에서도 도나 카렌의 옷을 입을 수 있게 해줬고 헬무트 랭(Helmut Lang) 역시 매 시즌마다 외출할 때 입어도 좋을 만큼 시크한 라운지 웨어를 선보여 왔다.

이외에도 최근 미셸 오바마의 전폭적인 지원 사격으로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는 J크루의 라운지 웨어 역시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세련되면서도 빈티지 필 팍팍 나는 라운지 웨어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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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Perse


■ 라운지 웨어 어떻게 입을까

라운지 웨어의 핵심 코드를 바로 믹스 앤 매치다. 윗도리도 겹쳐 입고 하의도 막 겹쳐 입는 것이다. 상의의 경우 얇은 탱크 탑 위에 같은 톤의 보이프렌드 티셔츠를 걸치고 다시 그 위에 후디나 슬리브리스 면 베스트를 걸쳐 입는 식이다. 여기에 하의는 레깅즈에 숏 팬츠를 덧입어도 되고, 편한 미니 스커트에 7부 레깅즈를 입어도 된다. 물론 일자형 파자마나 박서를 단독으로 입는다고 뭐라 그럴 이는 하나도 없다.

만약 조금 더 엘레강스해지고 싶다면 코튼 소재 슬리브리스 드레스에 슬리브리스 롱 베스트나 같은 톤의 롱후디를 겹쳐 입어도 좋겠다.

그런데 외출복 코디만으로도 머리 아픈데 집에서까지 이렇게 공들여 입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패션의 가장 큰 순기능인 자기만족이 가장 극대화되는 영역이 라운지 웨어 정도라고 해두자. 그래도 도통 이해가 안 간다고? 그렇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한번쯤 시도해 보길. 우울한 어느 저녁이 제법 환해 질 테니 말이다.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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