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승욱이 이야기 - 1990년 여름

2009-07-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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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사용하던 승욱이 보청기가 혹시 집에 있을까싶어 여기저기를 뒤지다가 눈에 확 들어오는 초록색 노트를 발견했다. 중학교 때부터 쓰던 일기장들 사이에 끼어있던 낡은 초록색노트를 말이다. ‘어? 이게 왜 여기 있지?’ 첫 장에는 1990년 여름, 대입을 준비하면서 친한 친구들 네 명이 돌아가면서 썼던 우정노트이다. 까맣게 잊고 지냈던 고교시절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덕분에 노트에는 간간이 예쁜 그림도 그려있고, 혼자보기 아까운 글들도 적혀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방구석에 앉아 키득거리며 추억의 페이지를 넘기고있다. 마치 20년 전으로 돌아간 듯 시간이 멈추어있다. 친구들의 얼굴 표정 하나 하나가 살아서 글 위에 움직이고있다. ‘그랬구나. 우리가 이런 시간도 있었지’ 유치하게 유명 연예인의 사진을 붙여놓고 서로 자기가 임자라고 사연을 빼곡이 적어놓지를 않나, 대입 끝난 뒤 무조건 미팅 10번을 강조해 놓지를 않나, 드라마 스토리를 적어놓고, 남자친구와 싸운 내용도 적어놓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친구들과 의미 있는 추억거리를 만들고자 내가 노트를 사고 내가 글의 시작을 써내려 갔다. 처음에 네 친구가 시작했던 우정노트는 반 아이들까지도 재밌게 돌려보면서 각자 한 줄씩 의미 있는 글들을 남겨두기도 했다. 처음 재밌고 유쾌한 내용과는 다르게 노트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마지막 모의고사, 배치고사, 그리고 대입까지 공부, 공부라는 단어가 페이지마다 빠지질 않고 있다. 공부 안 한다고 부모님께 혼나고, 시험성적 나쁘다고 선생님에게 꾸중듣고, 친구들보다 점수 안 나온다고 자존심 팍팍 상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부모님 밑에서 공부하라는 잔소리 들으며, 공부를 강조하던 선생님들 밑에서, 친구들과 공부하던 그 시간들이 너무도 그립다. 부모님도 선생님들도 한결같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기 싫은 공부하던 시간이 먼 훗날 가장 그리울 거라고 . 왜 그땐 그 말이 짜증나도록 듣기 싫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날이 새면 아이들에게 우정노트를 보여줄 생각이다. 우리아이들의 학창시절이 지금과 너무도 다르지만 한가지 같은 건 공부하기 싫어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 같다. 엄마의 노트를 보여주며 지금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시간인지에 대해 말하고싶다. 그리고 친구들과 좋은 추억거리도 많이 만들라고 말해주고 싶다. 1990년 여름의 이야기를 나눌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김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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