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물소리 새소리 황톳길 낭만 가득

2009-07-1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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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 국토 종단기 <13> 경북 문경새재

국토종단 17일째다. 문경 장날이다. 오이, 가지, 시금치 등을 놓고 아주머니가 손님을 부르고 있다. 좀 깎아주라느니 안 된다느니 흥정하는 소리. “자- 싸요, 싸” 큰 소리로 사람을 불러 모으는 소리들로 왁자지껄하다. 오랜만에 보는 눈에 익은 풍경이다. 할머니가 쑥떡을 팔고 있어 천원어치를 샀더니 제법 먹을 만큼 싸주고도, 우수리라면서 한 개를 또 얹어 주신다.


‘새나 넘는 험한 고개’엔 3개의 관문
인근 KBS‘왕건’세트장 새 관광명소


기회를 놓칠세라 선거유세단이 판을 펼친다. 교육위원 선거다. 30여명의 운동원들이 유니폼을 입고 경쾌한 노랫소리에 맞춰 춤을 춘다. 장꾼을 헤집고 다니며 유인물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건너편 쪽에서는 다른 후보가 마이크를 잡고 소리를 내지르고 있다. 시골 장날은 이래저래 시끌벅적하다.

새재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데 ‘청운각’ 표지판이 나타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20대 젊은 나이에 이곳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하숙하던 집이다. 젊은 시절 잠깐 머물었던 하숙집이 역사적 장소가 되어 문화재로 보존되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최양업 신부가 순교한’ 진안리 성지 표지석이 서있다. 1861년 6월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 보고를 위하여 상경 하던 중 과로와 식중독으로 마흔 살 나이에 병사했던, 바로 그 장소에 천주교 안동교구에서 비석을 세웠다.

문경새재 정문을 통과하여 길 따라 올라가는데 ‘혼을 구워 명품을 빚는다’ ‘막사발의 본향 문경’ 현수막이 걸려있다. 도자기 박물관이었다.
들어가 보니 도자기의 역사를 비롯 민속품들을 정리해 놓았고, 방문객들에게 도자기 만드는 전 과정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관문을 향해 올라가면서 보니 왼쪽 언덕에 자연생태 전시장이 있고,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줄지어 내려오고 있다.

새재는 새나 넘을 수 있는 험한 고개라는 의미에서 ‘조령’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세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관문의 이름은 올라가며 만나게 되는 순서에 따라 제1관문(주흘관), 제2관문(조곡관), 제3관문(조령관)으로 부른다.
제1관문 앞에 섰다. 높게 쌓아올린 성벽이다. 성문 위 망루에 주흘관 현판이 걸려 있다. 사람의 통행을 제한하던 성문이고, 전쟁때 적의 진격을 막아내던 튼튼한 돌벽이다. 관문을 지나면 새재 길이 시작된다. 길은 황토로 잘 다져 있고, 길 옆 도랑을 따라 물이 흐른다. 몇 사람이 편하게 비켜갈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이다.

무엇보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아서 좋다.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면서 소나무 숲길을 걷는다. 솔 냄새가 향기롭고 상쾌하다. 맨발로 걷고 싶은 길이다. 한 젊은이가 신발을 목에 걸고 맨발로 걸어간다. 부럽다. 발이 부르트지 않았으면 나도 저렇게 걸을 텐데.

평일인데도 재를 오르는 사람이 많다.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온 사람들도 있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 만큼 잘 닦여진 길이다. 왼쪽으로 KBS 촬영장이 보인다. 왕건 영화를 찍을 때 만들어 놓은 세트장인데 입장료를 받고 있다.

‘일지매 산채’로 오르는 길 표지판을 지나자 마당바위가 보인다. 마당처럼 넓은 바위다. 의적 일지매가 목도를 집고 부하들에게 일장 훈시를 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탐관에게 빼앗아 온 물건을 쌓아 놓고 술판을 벌이는 모습도 함께 비추인다.

주막집이다. 옛 모습을 재현해 놓은 초가집이다. “이 새재는 조선시대 영남에서 서울을 오가는 가장 큰 길이었으니,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 길을 오르던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험준한 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 잔의 술로 여독을 풀면서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가던 곳이다.” 는 설명문이 보였다. 초가지붕 넘어 골짜기에 산 벚꽃이 환했다.


주막집 앞에 ‘새재에서 묵다’는 제목의 시 한수가 남아있다. “험한 길 벗어나니 해가 이우는데 / 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 / 산새는 바람 피해 숲으로 찾아들고 / 아이는 눈밟으며 나무지고 돌아간다 / 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 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 / 잠 못 드는 긴 밤 적막도 깊은데 / 싸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얼 비치네. ”

해가 지면 산 속은 어둠이 쉬이 내린다. 산새도 제 집을 찾아 들고, 나뭇짐을 진 아이놈도 눈 밟으며 바삐 돌아가는데 주막으로 가는 길이 어둠속에 가물가물. 이 시를 보고 있노라면 눈 쌓인 초저녁 겨울 산속 풍경과 주막집 선비의 모습이 눈에 환하게 떠오른다.

바람 한 점 솔잎을 스쳐간다. 솔향 속에 막걸리 내음이 섞여 있다. 에라이 모르겠다. 마침 다리도 컬컬한데 저 선비를 모셔와, 권커니 잣커니 동동주나 한 잔 하면서 쉬어가자꾸나. 거기 주모 있능가, 여기 술 상 하나 봐 주시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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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장날 풍경. 물건을 파는 아주머니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제법 사람사는 멋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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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부근의 주막 앞에 세워진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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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이 20대 때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당시 기거하던 하숙집 ‘청운각’.


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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