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려, 이려, 밭가는 소리 어찌나 정겹던지

2009-05-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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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 실

잠자리 걱정에 모텔까지 안내
휴게소 아주머니 인심 못잊어


아홉 째 날이다. 갈재. 전라북도 순창과 임실군경계다. 임실을 향해 가파른 길을 한참 내려가니 왼쪽으로 덕치초등학교가 보인다. 섬진강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용택 시인이 근무하던 곳이다. 멀리 섬진강에 아침 안개가 피어오른다. 저 강둑을 따라 올라가면 그가 사는 마을이 나온다.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참 좋은 당신>이라는 그가 쓴 시의 전문이다. 아내를 존중하고 존경한다는, 아내에게 물 한 그릇 가져와라 한 적이 없다며 수줍게 웃던 그가 생각난다. 영락없는 촌사람, 평생 동안 고향을 지키며 그 산천을 노래해 온 그를 보면서, 한 사람의 시인 때문에 한 지역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하다. 5년 전, ‘오렌지 글사랑 모임’ 10주년 행사에 예정보다 3시간이나 늦은 밤 10시쯤 도착하여 “사람이 살다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으며 살아가게 마련이지요”라며 능청을 떨며 강연을 시작하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섬진중학교를 지나자, ‘둘레산 둘레강’이라는 회사 간판이 보인다. 이름이 예쁘다. 산과 강에 둘러싸인 이 지역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삼거리 식당에서 ‘다슬기탕’으로 아침을 먹었다. 다슬기와 부추, 호박을 넣고 수제비 몇 점을 동동 띄워놓았다. 된장을 넣지 않은 담백한 맛이다. 한참을 걸은 다음이라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걸어가면서 각 지방의 특색 있는 음식을 먹어보는 재미가 솔 찬하다.

신기마을, 이목마을 등을 지났다. 효열문이 보인다. 들판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넘고 넘어도 또 산이다. 뒤를 돌아보니 넘어온 길이 아슬아슬하다. 적막하다. 어찌된 일인지 남도 산길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그 많던 꽃조차 보이지 않는다.

‘국립임실호국원’ 표지석이 보인다.

산이 많은 이 지방에서 6.25때 많은 분들이 희생되었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도 조용했을까.

가파른 언덕 하나를 올랐다. 임실읍 7킬로 표지판이 보인다. 부근 공원잔디에 누웠더니 저절로 잠이 든다. 한 숨을 자고 나니 몸이 훨씬 가볍다. 가다 지치면 잔디에 누워 눈을 붙인다. 갈수록 요령이 늘어간다.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지나던 트럭이 서더니 젊은 운전사가 오렌지주스 한 팩을 주고 간다. 목마른 사람들로 보였나보다.

봄 산은 어쩌면 저렇게 싱그러운지. 저렇게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나무에 따라, 잎이 피어나는 순서에 따라 수백 가지의 초록을 뽐내고 있다.

저 형형색색의 초록을 쫓아 봄 산에 들어가 가만히 귀 기울이면, 귀 밝은 사람은 나무들이 싹을 키워내며 내 지르는 탄생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 집안이 떠나갈 듯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나무들도 새 싹을 내밀 때 소리를 지른다. 생명이 태어나는 기쁨의 소리로 가득한 봄 산에 들면, 당신도 온 몸에 솟구쳐 오르는 새 생명의 기운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참을 가다보니 산 위에서 “이려, 이-려” 소 모는 소리가 들린다. 오래전 익숙했던, 바로 그 소리다. 농부가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다.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그렇지만 남도를 올라오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처음 보는 광경이다. 반가웠다. 가파른 산기슭을 따라 밭으로 올라갔다. 농기계가 들어올 수 없는 이런 산골짜기 밭들은 소가 아니면 일구어 낼수가 없을 터. 중년쯤 보이는 아저씨가 밭을 갈고 있다.

사진을 한 장 찍겠다고 양해를 구했더니 소와 쟁기를 놓아두고 저만치 피해버린다. 당황스러웠다. 다시 설명을 하고 사정을 해서 어렵게 사진을 찍었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 중 가장 힘들게 얻은, 소중한 사진이다.

임실읍이 가까워온다. 군청에서 세운 “논밭두렁 태우려다 금수강산 다 태운다”는 불조심 현수막이 보인다. “임실초 89회 심병찬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입학”이라고 쓴, 임실초등학교동창회에서 내건 광고가 펄럭인다. “마님은 왜? 마당쇠에게 숯불장어를 주었나”하는 음식점 광고판도 보인다. 내용들이 재미있다.

27번 도로 제일휴게소에 들러 점심 겸 저녁식사. 잠자리를 걱정하자 휴게소 주인아주머니가 관촌면사무소 산수장 여관까지 데려다 준다. 사람들이 남을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다. 나도 그랬을까. 내일은 전북 진안군을 걸어간다.

정찬열
도보 국토 종단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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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워낭소리’ 탓인가. 임실읍 인근 야산에서 농부가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이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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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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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열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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