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항 고기 vs 바다 고기

2009-04-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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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토스 도서관에 가면 로비에 대형 수족관이 하나 있다. 나는 거기 사는 고기들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상상해 보건대 눈빛에 왠지 답답한 듯 수심이 서린 고기는 바다에서 건너온 놈이다. 그에게 수족관은 너무 좁다. 반면 아무 생각 없이 힘차게 인공수풀을 이리 저리 헤치고 다니는 놈들도 있다. 물어보나마나 수족관 태생이다. 그들은 바다를 모른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는 대학교 2학년 때였다. 그 후 소설이나 시, 영화를 대할 때 느낌이 달라졌다. 이전엔 편안한 고향 같던 작품들의 뒷배경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바다로 나온 뒤 다시 어항 속에 짐짓 비집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문학에 심취해 있었다. 문학가나 예술가들은 삶의 진짜 배후를 탐지하는 사람들, 잃어버린 ‘바다의 추억’을 아련하게나마 떠올리려는 사람들이다. 존재보다 소유에 집착하며 별 고민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눈빛이 다르다. 지금도 나는 그들의 그 ‘가난한 눈빛’을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시한 채로는 그들의 모든 고민이 마치 수족관 속에서 드넓은 바다로 건너뛰려는 절규 섞인 몸짓과도 같다. 몸부림을 칠수록 절망감이 더 깊어진다. 어떤 소설가는 이렇게 푸념하듯 내뱉었다. “세상엔 의미 따윈 없어. 저기 꽃이 있을 뿐이야.”

시인들도 이런 어조의 무의미나 끝없는 자기 연민을 곱씹는 데 익숙하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눈으로 살자.” 그렇게 한 달 내내 뜬눈으로 섬 생활을 무사히 잘 보낸다고 해서 그리운 것이 다 없어질 거라고는 애초부터 시인 자신도 믿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절대 그리움의 대상, 곧 신의 주소지를 제대로 캐내기는 꺼린다. 신을 만나면 그 순간부터 창의적인 예술 활동이 시들해지지 않을까 오해한 탓이다. 그들에게 신의 거처는 여전히 ‘존재의 무덤’이다. 이런 태도는 어쩌면 피조물이 창조주와 대등해지려는 시도다. 예술행위를 통해 또 다른 창조주가 되어 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들뿐만 아니다. 하나님 없이도 삶을 꾸리는 데 전혀 아쉬울 게 없다고 믿는 사람들, 그분을 만나면 자기 삶에 즉각 달갑지 않은 제약이 따를 거라고 믿는 사람들 역시 비슷한 몸짓을 부리며 산다.

바로 그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 독립적으로 ‘딴살림’을 챙기려는 교만과 탐심 때문에 최초의 인간이 불순종의 죄를 지었다. 그 후로 이 세계는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타락과 죽음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 속 가장 깊은 처소에는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흔적이 있고, 그 ‘바다의 추억’이 있다. 그러나 죄와 죽음의 굴레에 단단히 얽어 매인 사람들은 혼자 힘으론 그 바다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하나님의 손길로 당신의 굴레가 벗겨지려면 선행 조건이 하나 있다. 애초부터 ‘이별’의 불씨가 된 교만을 버리고 창조주께 온전히 의탁하는 피조물의 본래 자리로 내려서는 것, 예술이든 철학이든 ‘내 힘으론 안 되는구나’ 실토하고 두 손 번쩍 들어 구조를 요청하는 것이다. 이 단순한 조건을 빨리 맞추면 맞출수록, 그만큼 더 시간을 벌게 될 것이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안환균 <남가주사랑의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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