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구비구비 2천리길 모국의 품 속으로…

2009-04-1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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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찬열·영희씨 부부 도보 국토종단기

커버 스토리- 해남서 영암으로


해남 땅끝 마을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말 그대로 한반도 절반의 끝과 끝이다. 구비구비 이어진 길의 거리만 대충 봐도 2,000리는 족히 될 듯싶다. 오렌지카운티에 거주하는 정찬열씨가 부인 정영희씨와 함께 모국의 평화와 발전을 기원하고, 인생 60년을 돌아보기 위해 배낭 하나 덜렁 메고 이 길을 밟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발길 닿는 곳마다 고향의 향수가 물씬 풍겨난다.



개나리·산수유 만발한 국도 따라
워낭 달린 지팡이 짚고 뚜벅뚜벅


“오세요/ 당신이 오실 때는/ 내가 기다리던 때입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향산천은 우리를 환하게 반겨 맞아 주었습니다.

국토의 최남단, 전라남도 해남군 땅끝 마을의 아침은 분주합니다. 갯내음 물씬 풍기는 자그마한 선창에는 인근 섬을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언덕 위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아스라한 섬 사이로 여객선이 지나갑니다. 나무계단 입구에 ‘땅끝 소망의 우편함’이 매달려 있습니다. 누구라도 원하는 것을 적어 넣으면 바람 따라 물결 따라 누군가에게 꼭 전달되어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무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땅끝 비석이 서 있고, 시 한 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곳은 우리나라 맨 끝의 땅/ 갈두리 사자봉 땅 끝에 서서/ 길손이여/ 토말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게/ 먼 섬 자락의 아슬한/ 어룡도 백일도 흑일도 당인도까지/ 장구도 보길도 노화도 한라산까지/ 수묵처럼 스며가는 정/ 한가슴 벅찬 마음 먼발치로/ 백두에서 토말까지 손 흔들게/ 수 천년 지켜온 땅 끝에 서서/ 수 만년 지켜갈 땅 끝에 서서/ 꽃밭에 바람일듯 손을 흔들게/ 마음에 묻힌 생각/ 하늘에 바람에 띄워 보내게.”<시 손광은·글씨 장전 하남호>. 흙 한줌을 봉투에 담아 배낭 속에 넣었습니다.

강원도 고성 통일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국토 종단길. 그 첫 걸음은 3월30일 11시50분에 시작되었습니다.

땅끝 마을을 떠나 바닷가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걸어가는 길이 아름답습니다. 오른쪽으로 흑일도, 백일도를 비롯한 작은 섬들이 바다에 동동 떠 있고, 왼쪽으로는 달마산, 두륜산 줄기가 병풍처럼 펼쳐 있습니다. 해안선을 감아 도는 능선을 따라 길이 굽이칩니다.

발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지팡이에 달린 워낭이 ‘댕그렁, 댕그렁’ 소리를 냅니다.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었듯이, 통일의지를 품고 걸어가는 이번 여정에 소 한 마리를 끌고 가자는 어떤 분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기축년 소의 해, 소 한 마리를 함께 상징하는 워낭소리를 앞세우며 소처럼 뚜벅뚜벅 걸어가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모처럼 휴가를 내어 따라나선 아내와 함께 걸어갑니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벚꽃이 환하게 피어나는 산천을 걸어가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를 흔들어 반겨주는 나무숲을 걸어가면서, “잘 왔다,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떠 있는 섬들을 보면서 “속을 모르면 청산도로 시집을 가지 말아라”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섬 총각에게 시집가기를 꺼리는 육지 처녀들에게 겨울만 되면 김 양식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는 청산도 사람을 빗대어 했다는 얘기입니다.

길을 가다가 김 양식작업을 하는 곳에 들러 점심을 얻어먹었습니다. 쉴 참에 길가는 나그네를 불러 밥을 먹여 보내는 풍속은 예나 지금이나 농어촌의 따뜻한 풍경입니다.

어디까지 가느냐는 아주머니의 질문에 강원도 고성까지 걸어간다고 하니, “오메-참말로 징허네요잉” “걸어서는 못 간당께요-”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맘때쯤이면 시뻘건 황토에 일렁이던 보리밭의 초록물결을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밭이란 밭에 모두 마늘을 심어 놓았습니다. 마늘밭이 푸르게 푸르게 등성이를 넘어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대를 따라 돈이 되는 작물을 심다보니 계절의 풍경마저 이렇게 달라집니다.

둘째 날 강진에 들어섰습니다. 해남과 강진은 유흥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일번지로 택한 지역입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를 “이 지역이 무엇보다 조국강산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과 바다와 들판이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아름다운 산천에 사는 사람들이 남겨놓은 많은 문화유산들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셋째 날입니다.

정약용 선생의 다산 초당과 동백꽃으로 유명한 백련사를 둘러보았습니다.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잃은 설움에 잠길 것”이라고 노래한 영랑의 생가도 돌아보았습니다. 다산 선생에 대한 이 지역 사람들의 애정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길가에 ‘정약용 선생의 딸의 묘’라는 입석 표지판을 보았습니다. 이 지역 출신 주먹들이 ‘다산파’라는 이름을 지어 활동한다는 우스개 얘기가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다산 초당 부근에 ‘늦봄학교’라는 곳이 있습니다. 문익환 목사의 정신을 계승하는 대안학교입니다. 그 학교를 방문해서 선생님과 학생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특별한 목적을 가진 특별한 아이들이 모여 특별한 희망을 예감케 해주는 학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후가 되자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만큼 강한 바람을 맞으며 강진 벌판을 가로질러 성전이란 곳에 도착해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나흘째 날 찾아간 곳이 영암 월출산입니다.

월출산은 남한의 소금강이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산세가 당당한 바위산입니다. ‘저녁 안개가 내려앉으면서 산의 두께를 느낄 수 있을 때 더욱 신비롭고 아름답더라’는 어떤 분의 얘기처럼 시시로 모습이 변하는 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이 산이 유명세를 타고 있습니다.

최고봉인 천왕봉과 마주하고 있는 구정봉이라는 거대한 바위가 있습니다. 바위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 개미만큼 작게 보일만큼 큰 바위입니다. 이 거대한 바위가 사람의 얼굴모형, 큰 바위얼굴이라는 사실이 최근에 우연히 발견된 것입니다.

월출산 천왕봉에 올랐습니다. 거기서 구정봉을 바라보았습니다. 영락없는 사람 얼굴 모습입니다. 세상에 저렇게 거대한 바위가 사람의 얼굴이라니. 머리, 이마, 눈, 코, 입, 볼, 턱수염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사람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어 감탄과 충격을 더해줍니다. 억겁의 시간 속에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큰 바위 얼굴은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월출산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다음날은 영암을 지나 영산포까지 걸었습니다. 한 때 어항으로 근방에 이름을 날렸던 영산포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항구가 아닙니다. 목포에 둑을 쌓아 그 내륙지역의 뻘이 모두 논이 되어버린 지금은 ‘영산포’라는 이름만 남아있습니다. 전에 갯물이 들고 나던 지역에 유채꽃이 환하게 피어 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꽃밭 사이로 나들이 나온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거닐고 있습니다. 저렇게 사람이 있어 봄이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4월4일, 영산포에서 광주에 이르는 길은 친구 한 사람이 동행해 주었습니다. 나주지역은 배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이제 막 푸른 싹을 틔우고 있는 배 밭이 곳곳에 눈에 띕니다.

너른 남평 들판을 지납니다. 이곳을 지나면서 다시 유흥준의 말이 생각납니다. “들판은 넓고 평평한데 산은 가깝게 다가오니 참 이상스럽다. 나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마치 길게 엎드려 누운 여인의 등허리 곡선처럼 느슨하면서도 완급의 강약이 있는 리듬을 느낀다.” 나도 이 벌판을 지나면서 그와 똑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의 말처럼 남도 사투리에서 말끝을 당기며 “잉” 소리를 내는 여운과도 같고, 구성진 육자배기의 끊일 듯 이어지는 가락같이도 느껴지는 것입니다. 남도의 포근한 들녘과 느릿한 산등성이의 곡선, 그리고 저 황토의 붉은 빛을 보면서, 이 지역 출신 천경자 화백의 강렬한 색깔도 그녀가 성장한 지역의 자연의 영향을 밭아 그렇게 강렬한 붉은 색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산에 가면’이라는 조운의 시 한 편이 생각납니다. 산에 가면/ 나는 좋더라/ 바다에 가면/ 나는 좋더라/ 님 하고 가면/ 더 좋을네라만! // 어찌 산만, 바다만, 좋겠습니까. 그 어떤 길이라도 좋은 님과 함께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만 있다면 거기가 바로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손에 손잡고 함께 걸어갈 날을 꿈꾸어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랑하는 내 형제와 함께 땅끝 마을에서 백두산까지 걸어갈 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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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열씨가 부인 정영희씨와 함께 땅끝 마을을 떠나 석양을 뒤로 한 채 국도를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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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어항으로 고깃배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던 영산포 일대. 만발한 유채꽃들이 이름만 남은 영산포의 추억을 대신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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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에게 바람 따라 날려 보내려는가. 땅끝 마을 전망대 입구에 설치된 ‘땅끝 소망의 우편함’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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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남단 땅끝 마을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해. 정씨의 국토 종단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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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사람의 얼굴을 조각해 놓은 듯한 영암 월출산 구정봉. 자연이 만들어 놓은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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