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거룩한 소유

2009-04-1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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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세계마라톤 신기록이 2시간3분59초라는 것을 들으시면 “언제 기록이 그렇게 빨라졌지?”라며 놀라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지난해 9월 제33회 베를린 세계마라톤대회에서 에티오피아 출신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 선수가 2시간3분벽을 깨뜨렸을 때, 온 세계가 놀랐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갈채 이면에 가슴 아픈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모릅니다.

1인당 연평균 수입이 180달러인 나라, 총인구 8,300만명 중, 38%가 하루에 생활비 1달러 미만의 절대 빈곤에 신음하는 나라, 총 인구의 22%만이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는 나라, 그래서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각종 질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나라, 수식어를 나열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 나라가 바로 게브르셀라시에가 태어나고 자란 에티오피아입니다.
이 나라 아이들에게 달리기는 사치스런 스포츠가 아니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의 하나입니다. 다행히 전 국토가 해발 2,0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여서 심폐기능이 자연스럽게 발달해 있고, 달리기는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대회에서 우승만 하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절박한 희망이 그들을 달리게 합니다.


3월 하순 4명의 후원자님들과 그분들이 후원하는 아동들을 만나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찾았습니다.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서 서남쪽으로 약 350킬로미터 떨어진 오모나다 지역에 아이들은 살고 있었습니다. 포장도로를 벗어나 울퉁불퉁한 적토 길로 약 10킬로미터를 달려간 산골 마을, 초가지붕의 흙벽돌집에서 수줍은 얼굴로 후원자님을 기다리던 아이는 후원자님이 전해주는 선물에 배시시 웃었습니다. 한 후원자님은 가져간 비눗방울을 아이와 함께 불었습니다. 아이의 미래를 축복하는 후원자님의 간절한 소망과 먼 곳에서 찾아 온 후원자님에 대한 아이의 감사함을 담은 비눗방울이 태양을 향해 무지갯빛으로 날아올랐습니다. 마치 약속의 표시인듯 말입니다.

후원금으로 시작한 감자협동농장으로 이들을 안내한 주민들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아무새키날루”(감사합니다)를 연발했고, 조악한 펌프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며 순박한 미소를 선사했습니다. 새로 지은 학교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은 우리들에게 “I want to be a doctor”라고 희망을 외쳤습니다. 우리가 후원하는 겨우 30달러가 그들의 희망이 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고, 동시에 그 작은 도움을 주면서 환영받는 우리가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4일간의 현지 방문을 마치고 아디스아바바로 돌아오는 길에 도로를 달리는 수많은 남루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맨발이었습니다. 일정한 형식도 없어보였고, 치열해 보이지도 않아 달리기대회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등에 붙은 흰 천이 그 마을의 달리기 대회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아마 모두가 맨발의 아베베, 또는 게브르셀라시에를 꿈꾸며 달리겠지요.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될 수는 없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달립니다. 올해도, 내년도, 그 다음해도… 왜냐하면 달리기는 놓고 싶지 않은 희망의 끈이기 때문입니다.

오모나다에서 떠나기 하루 전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잠시 대화를 하던 중, 달라스에서 함께 오신 최 목사님이 불쑥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기 오기 전까지 무소유를 제 인생의 중요한 명제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소유할 것이 전혀 없는 저들을 보면서 무소유라는 단어가 얼마나 사치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소유하되, 나누기 위한 소유를 할 것입니다. 소유하지 않으면 나눌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거룩한 소유’라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박준서 (월드비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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