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꽃보다 당신

2009-04-0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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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가는 건 천하장사도 막을 수 없나 보다. 잎도 나기 전에 서둘러 피는 산수유를 닮아서일까? 벌써 춘삼월이 꽃향기 날리며 줄행랑 치고 있으니 말이다.

도심의 설경을 볼 수 없는 “구백당” 캘리포니아에 살고는 있지만, 사시사철 자연의 시계 앞에 군말 없이 순종하는 형형색색 꽃들은 겸손을 가르치는 멋진 스승이다.


얼마 전 위성방송으로 산수유가 가득한 조국 산하의 봄동산을 보게 되었다. 노오란 꽃망울이 톡, 하고 터진 모습에 심취해, 나는 태평양 건너서도 가슴 울렁거리는 봄처녀가 되고 말았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하얀구름 너울쓰고/ 진주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 오시는고.’ 나도 모르게 여학교시절 달고 다녔던 가곡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옛날 음색은 아니지만 피아노 치며 불러 보니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아릿함에 괜스레 눈시울이 촉촉해진다. 혹독했던 겨울 같은 일제 시대를 이겨내고자 쓰여진 곡이여서일까? 중학교 때부터 불렀던 ‘봄 처녀’는 왠지 모르게 슬프고 애절했다.
봄이 아니라도 누구에게 꽃다발을 선물 받는다면 환한 미소를 짓게 되듯이, 우리 모두가 꽃 같은 향기를 지닌다면 만나는 사람마다 가슴 설레는 봄 처녀가 되게 할 것 같은데…

요즘 우리 딸들은 ‘꽃보다 남자’에 푹 빠져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2세들인데도 요즘 ‘핫’한 화제인 꽃미남 4인방 때문에 노트북 앞에서 울다 웃다를 반복한다. 그 유명한 드라마를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아이들을 통해서 등장인물과 얽힌 에피소드들을 간간히 전해 들으며 꽃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본다.

꽃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의 일생 중 가장 화려한 시간들을 꽃이 피었다고 말하고, 아름다운 인물이나 고귀한 행동도 꽃에 비유한다. 만개한 꽃보다 사춘기 소녀의 가슴 같은 봉긋한 꽃망울은 신비로움 그 자체로 말을 잊게 하다. 아름다운 꽃 앞에선 잊었던 시인의 노랫말이 터져 나온다. 마음의 무게도 한 순간에 내려 놓게 하는 요즘 같은 불경기에 효도상품 1호다.

애송하는 김춘수의 ‘꽃’도 생각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고.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나는 꽃이 된다. 인정해 주는 것은 사랑의 이해, 묵묵한 기다림, 따뜻한 관심, 환한 미소를 머금은 눈빛이다.

의미 없던 사소한 것들까지도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꽃처럼 아름다운 빛을 발하며 향기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피터팬의 팅거벨이 뿌려 주는 마법의 별가루처럼….


남이었던 부부가 함께 살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 받을 때 최고의 잠재력을 발휘하게 되고, 엄마의 뜨거운 사랑과 헌신이 핏덩이 자녀를 꽃피게 만든다. 관심을 갖고 주위를 둘러 보면, 수많은 ‘사람꽃’들이 만발해 있음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살맛나는 일이요, 복된 은혜다.

꽃을 의인화해서 지어낸 수많은 꽃말들을 찾아보면 그 주제가 ‘사랑’이다. 결국 누구를 인정해 준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임을. 사랑 할 때 꽃이 피고, 그 꽃으로 인해 열매도 열린다는 자연법칙이 왜 이렇게 감사하고 고마운지 가슴 한쪽이 따뜻해져 온다.

노오란 쇼울을 걸친듯, 지상에서 하늘로 일렁이는 산수유 물결. 그 아름다운 봄 꽃 퍼레이드에 눈과 마음이 호사를 누린다.

오늘은 저녁상을 물리고 남편에게 이렇게 말해 주련다. “여보! 나는… ‘꽃보다 당신’이야”라고.


정한나(세계선교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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