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톨레랑스

2009-03-20 (금)
크게 작게
‘대한국민의 친애하는 어르신’으로, ‘바보 할배’로, 무심한 ‘옹기’처럼 무디게 사시다, 얼마 전 선종하신 김 스테파노(수환) 추기경님. 그분의 무염한 삶의 여향이 봄내음을 타고 더욱 싱그럽다.

언제나 ‘사람’의 편에 서 계셨던 그 분의 일생을 몇 마디 사람의 말로써 표현한다면, 잘 알려진 바대로 감사, 사랑, 헌신, 용서 등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분의 삶을 증거 하는 한 마디는 바로 ‘톨레랑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관용’으로 번역되고 혹은 의식의 개방을 의미하는 ‘열린 마음’으로 의역되기도 하는 프랑스어다.

톨레랑스란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하는 것이며, 자기중심주의의 포기’로, 또한 ‘막을 수 없는 다른 존재를 너그럽게 수용하는 것’등으로 정의된다. 특히, 프랑스의 사회학자 필리프 사시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톨레랑스의 사전적 의미를 ‘나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행동이 존중 받기를 원한다면, 우선 다른 사람의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톨레랑스는 서로 갈등하는 다양한 집단들로 이루어진 현대사회에서 다양성을 수용하고 존중함으로써 공존과 화합을 가능케 하는 덕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톨레랑스는 논어에서 말한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는 말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화이부동이란 군자는 화합하고 화목하되 남들에게 똑같아지기를 원치 않거나, 소신 없이 쉽게 남과 똑같아지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동이불화란 소인은 같은 점이 많아도, 아니면 소인은 쉽게 동화되나, 서로 화합하지는 못한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열린 마음’ 그 자체로, 타종교의 가치를 수용하면서도 그리스도교가 지니는 소명에 충성하셨던 추기경님의 신행에는 돋보이는 일화들이 많이 있다.

법정 스님과의 인연으로 스님이 주석하고 계신 사찰을 방문하시어 법당에서 합장하시던 모습이나, 스님을 명동 성당으로 초청하시어 법문을 청하셨던 일 등은 참으로 아름답고 환희로운 ‘큰 사람’의 면모였다. 특히, 종교적으로 극히 예민한 부분인 조상제사에 대해서도, 그분은 ‘돌아보면 조상제사는 미신이 아니라 부모 사후에도 효를 실행하기 위한 것으로, 이를 인식한 천주교에서는 1939년 조상제사를 허용했다’고 설명하신 바 있다.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 벽안의 현각 스님도 김 추기경님을 뵙게 된 사연을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언젠가 김 추기경이 제사상 앞에서 절 올리는 사진을 신문에서 보고, 미국 선교사들이 버리라고 한 전통을 지키는데 대해 너무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뉴욕의 한인 성당으로 김 추기경을 찾아가 약 한 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나눴는데, 큰 스님 같고 할아버지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불가의 보살의 본성을 ‘이기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으나, 나란 너와의 관계성 속에서만 비로소 나일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며, 그것을 사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추기경님은 분명 보살(성자)로서 톨레랑스의 화신이며, 지극히 낮은 이 되어, 지극히 낮은 이에게도 지극하신 이였음으로, 진정 거룩하시다!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박재욱(관음사 상임 법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