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삼(소유디자인그룹 대표)
폼페이 시라면 누구나 한 번 쯤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AD 79년에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해서 잿더미 아래 묻어버리고 말았고, 18세기가 되어서야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 폼페이 시는 제가 거주하는 포트리 시와 흡사하다.커뮤니티 센터 격인 광장을 중심으로 시의회실, 선거실, 타운홀, 종교행사의 집회지인 신전들, 시장들, 의류 및 염색점 중심의 에우마키아의 건물(지금의 몰), 길거리 상점군 형태의 스트라다 델 아본단짜, 개인 주거지역 등으로 나뉜다.
폼페이 광장은 초기 로마의 도시 중심을 잘 보여 주는 중요한 예가 되는데, 지금 뉴욕시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이 추구하는 것처럼 중요한 몇 곳에는 차량의 통제를 제한하여 중심 교통망과 분리시켰다. 이 광장은 종교적, 항업적, 행정적 중심의 기능들이 결합되어 있는 도시의 심장부가 된다.같은 방식으로 이것은 제국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도로를 가로질러 가는 보행자용 디딤돌은 마차바퀴 폭만큼씩 간격이 띄어져 있다. 대부분의 교차로에는 계속하여 흘러넘치는 분수대가 있었다. ‘스트라다 델 아본단짜’는 지금의 뉴저지 팰팍의 브로드 애비뉴처럼 작은 상점, 사무실, 선술집, 빵집 등이 있는 상가 형태를 갖추었다.연이어 있는 상점들 중간중간에 개인주거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이 개인 주거는 상점 뒤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으며, 완전히 둘러싸여져서 상점으로부터 분리되고 거리의 먼지나 소음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로마 제국시대 전반을 걸쳐 개인주거 건축은 고도로 발달하였다. 판사의 주택같은 부유층의 도시형 주거는 뉴저지 알파인의 고급 주택들처럼 주로 보도에 면하여 있다. 좁은 문을 통과하면 현관이 나오며 이는 안뜰로 이어진다. 중정은 지붕의 중앙에 개구부가 있으며, 그 아래쪽의 바닥에는 빗물을 받기 위해 움푹 파놓은 곳이 있다. 건물의 측면을 따라 침실들이 만들어져 있으며, 중정의 끝부분에는 2개의 작은 방이 양측에 자리잡고 있다. 중정의 뒷부분에는 가족의 중요 문서나 조상 등이 보관되어 있는 타블리눔이 있다. 타블리눔은 막혀 있기도 하며, 페리스타일쪽으로 가는 통로가 나 있을 수도 있다.이 페리스타일은 그리이스에 기원을 둔, 열주랑으로 된 넓은 마당이다. 이 마당에는 분수와 정원이 있고 이것을 둘러가며 가족의 개인방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 뒤로는 보통 채소밭이나 과일밭 등이 위치한다. 제국시대 초기의 로마시의 인구는 거의 100만에 가깝게 증가되었다. 그에 따라 넓게 펼쳐지는 중정식의 주택들은 다층 아파트 건물인 ‘인슐라(섬이라는 의미)’로 대치되어야 했다.
이 아파트는 로마 시 인구의 90%를 수용했다. 대부분이 벽돌로 건설되었지만 몇몇은 콘크리트로도 건설되었다. 일층은 주로 상점으로 사용되었으며, 위층은 아파트로 각각의 계단을 통해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아파트는 꽤 넓었으며 때때로 두 층에 걸쳐 방을 12 개씩이나 갖는 것도 있었다.
대개 이 인슐라는 중앙의 뜰을 둘러싸고 지어졌으며, 많은 아파트들이 발코니를 갖고 있었다.사치스러운 아파트에만 개인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인슐라에는 개인 목욕탕이 없었으며 그 대신 공중목욕탕들이 도시전체에 걸쳐 편리하게 위치하여 있었다.
난방시설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오늘날 까지 연대 추정을 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아파트 건설에 사용된 벽돌에 제조날짜가 찍힌 날인이나 각인 등의 방식으로 그 연대를 남겼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의 대부분의 아파트 주택은 네로 황제 때의 대화재 이후인, AD64년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이후로마는 개인 주거인 도무스가 군데군데 끼어 있는 도시구획의 체계를 채택했다.다음에는 영화로 유명해진 건축물인 콜로세움과 로마시대 대중들에게 인기있었던 칼라칼라 욕장(대중 목욕탕)에 대해 다루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