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면죄부에 대한 오해

2009-03-06 (금)
크게 작게

요즈음 신문지상에 가톨릭교회의 ‘면죄부’에 대한 왜곡된 이야기들이 자주 대두되고 있다. 속내용을 알지 못하는 신자나 일반인들이 듣기에는 가톨릭 교회가 마치 돈을 받고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는 것으로 곡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신학적으로 ‘죄’의 정의는 관계성을 깨뜨리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다시 말해 죄를 짓는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이나 이웃사람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파손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신을 속이거나 남을 미워하거나 하느님께 떳떳지 못한 삶을 살면 죄의식을 갖게 된다. 거짓이나 미움이나 하느님을 등지는 행위는 그래서 서로 사이의 관계성을 깨뜨리는 ‘죄’를 낳는 다는 말이다.


이런 깨어진 관계성을 ‘회복’시키지 않고는 죄가 없어질 수가 없는 것은 그래서 너무나 자명한 사실 아닐까? 그 때문에 어떤 교회가 관계성이 회복되지 않은 죄를 돈을 받고 사해 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면죄부를 준다 해도 스스로 자유로움을 느낄 수도 없다는 말이다. 만일 돈을 내고 면죄부를 받아 심령이 자유로워진다면, 세상의 돈많은 부자들로 인해 가톨릭교회가 문전성시를 이룰 것 아닌가? 그리고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공로로 돈 한 푼 내지 않고 묵상으로 고백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 받을 수가 있는데, 누가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겠는가? 이것이 바로 면죄부에 대한 오해를 입증해 준다.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깨어진 관계성의 ‘회복’없이, 요술방망이 식으로 사람의 죄를 ‘돈 받고’ 사해 주는 일을 하지도 않았고, 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 기회에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그래도 의심이 간다면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다 최근 우리 곁을 떠난 ‘김수환’추기경의 삶을 보고 믿기 바란다. 그분은 평생 불의에 항거하신 시대의 ‘양심’이셨기에 말이다. 평생을 ‘진리’와 ‘구원’의 증거자로 살다 가신 그분이 진짜 돈 받고 죄를 사해주는 면죄부 같은 것이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면 그대로 보고만 계셨겠는가?

그럼 사람들이 말하는 ‘면죄부’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원래부터 천주교회 안에는 ‘면죄부’란 단어는 아예 존재치 않는다. ‘면죄부’는 오해로 생겨난 단어다. ‘면죄부’가 가톨릭 교회가 베푸는 ‘전대사’에 대한 보속과 희생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인간적인 생각의 왜곡된 단어일 뿐이란 말이다.

실제로 가톨릭 신자든 개신교 신자든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피 흘려 속죄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만으로만으로 죄가 사해짐을 믿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죄의 사함을 받은 믿는 이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완전 자유’를 느끼고 기쁘게 살아간다. 그런데도 믿음이 약해 죄사함을 받았는데도, 용서받은 죄가 남기고 간 상처의 흔적이 낳은 죄의식 같은 ‘잠벌’ 때문에 우리는 때로 양심의 자책으로 시달림을 당할 때가 있다. 인간을 괴롭히는 자책과 회한, 분노와 상심 같은 잠벌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가톨릭교회는 선행과 자선, 기도를 통해 ‘전대사’를 베푼다. 그러므로 전대사는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용서받은 죄가 남긴 ‘잠벌’을 덜어주는 은총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기도와 희생, 선행과 자선을 통한 이런 전대사를 마치 돈을 받고 ‘죄’를 사해 주는 것으로 오해한 데서 ‘면죄부’란 왜곡된 단어가 잘못 생긴 것이다.

이 오해가 도화선이 되어 오늘날까지 수세기 동안 ‘같은’아버지, ‘같은’주님, ‘같은’ 성령 안에서 똑같은 자식으로 태어난 신·구교 크리스천들이 형제간의 우애에 금이 가서 아버지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리고 있다. 이를 생각한다면, 이제라도 ‘면죄부’에 대한 오해를 풀고 모든 믿는 이가 주님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김재동<가톨릭 종신부제>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