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천연 기념물 - 승욱이 이야기

2009-01-3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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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경주로 가는 길이다. 내가 한국에 온것을 아시고 고모들이 당장 경주로 내려 오지않으면 연을 끊겠다는 으름장에 서둘러 기차를 타고 내려가고 있다.

거의 십년만에 만나는 고모들이 마치 몇 달 전에 만나 뵌 듯 너무나 살갑고 좋다. 이것이 바로 가족인 것 같다. 친정에서는 내가 막내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 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모들을 만나서 그런지 고모들이 더 나를 토닥이며 측은해 하시는 것이 행동에서 느껴진다.


주중에 미리 경주에 와서 사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남편이 경주로 오기로 했다. 남편이 경주에 오니 고모들과 사촌들이 전부 남편에게만 신경을 써 주신다.

“이 서방, 그 동안 고생했제. 얼굴 많이 상했네. 혼자 생활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노. 요즘 이 서방 같은 사람이 없는기라. 마누라 없이 저리 열심히 사는 사람이 요즘에 어디 있노?”

고모들이 남편 칭찬을 해주시니 처음에는 너무 감사하고 고마웠는데 점점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남편만 다들 치켜세워주니 은근히 화가 나려고 한다.

“요즘 세상에 어느 남자가 마누라 떨어져서 잘 살겠노, 딴살림 차리거나 바람 피지 안 그라나?” 마치 바람 피지 않고 있는 남편이 무슨 천연기념물로 생각하시는 것 같네. 친정 이모도 저렇게 말씀하셨는데 고모들도 저렇게 말씀하신다.

고모들의 칭찬에 어깨에 힘이 들어간 남편이 “진짜 나 같은 남편이 없어. 아냐? 이 바보야?”

허참. 무슨 바람 피지 않는 것이 자랑이라고 뭐가 저리 당당한 건가. 당연한 것을 굉장히 특별하게 생각하는 상황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 다들 높은 점수를 후하게 주고 있다. 남편을 볼 때마다 치켜세우며 말씀을 하시는 고모들에게 은근 섭섭해 하고 있는 중에 내가 한마디 던졌다.

“아니, 나도 열심히 살고 있어. 난 정말 곁눈질도 않고 지금껏 살았다구, 미국에서 사는 난 뭐 쉬운 줄 아나?”


내가 살짝 삐진 것을 눈치챈 고모가 나를 살짝 부른다.

“에고. 가시나야. 니가 잘 못살았다는 것이 아니고 이런 상황에선 이 서방을 높여줘야 하는 기라. 물론 너도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것 알지, 하지만 이 서방은 우리 가족들이 세워주지 않으면 누가 알아 주노. 너하고 더 잘살라고 우리가 이러는 기라. 그래야 남자가 더 책임감이 생기고 옆 눈 안 돌리고 사는 기라. 알았나?”

고모들 마음을 알았다. 칭찬으로 더 기를 세워주는 지혜를 한 수 배웠다. 가족들 마음은 알았는데 과연 바람 피지 않고 사는 것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만한 일인가? 당연한 일 아닌가? 도대체 세상에 어찌 바람 피지 않고 있는 것을 칭찬하고 높이 평가하는 세상이 된 것인가. 고모들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우면서도 한쪽 가슴은 참 씁쓸하다.

김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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