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 바라보기- 하고 싶었던 세 개의 목록을 지우다

2008-12-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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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는 나에게 무엇보다 뜻 깊은 한 해였다. 바로 남편이 그 긴 시간의 공부를 마치고 드디어 직장을 갖고 출근과 퇴근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참 오랫동안 나에게는 남편이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돌아온다 라는 말이 익숙해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남편의 공부로 인하여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미루며 살아왔었다. 그러나 이번 여름부터는 남편이 우리 가족을 위하여 일을 하러가며 나는 그 동안 내가 꿈꾸어 왔던 목록을 차례차례 해보게 되었다.

그 처음은 이미 정해져 있는 월급이지만 출근길 남편에게 큰 목소리로 “돈 많이 벌어와.”라는 말을 해보는 것이었다. 이 목록은 이번 여름부터 바로 오늘 아침까지 나는 매일매일 남편에게 웃으며 말하고 있다.

그리고 목록 하나를 마음의 검은 펜을 들고 지운다. ‘드디어 첫 번째 목록 해보았음.’ 다음은 콧소리는 아닐지라도 애교 섞인 목소리로 먹고 싶은 음식을 사달라고 말해 보는 것이었다. 우습지만 감자튀김이 먹고 싶은 날 어디 드라마에 나오는 새댁처럼 “정연이 감자튀김 먹고 싶은데. 사 줄 수 있어?”라고 이야기해보았다. 물론 내 남편이 이런 나를 보고 박장대소했다. 항상 공부해, 시험 언제야? 언제 발표해? 빨리 연구실에 가 라는 엄마말만 하다가 갑자기 아내가 콧소리를 내니 많이 웃겼나보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목록을 하기 시작하니 남편도 나도 사이가 좋아졌다. 나는 작은 바구니 감자튀김에도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사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작은 것부터 남편에게 감사하기 시작했고, 이런 나를 바라보는 남편이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편이 웃으니 나는 더 좋았다.

그래서 나는 이번 여름부터 장을 보아도, 무엇을 하나 사도 당신이 힘들게 벌어 온 돈으로 이것을 살 수 있었다고 감사하다고 말하기 시작했고, 아이에게도 아버지께서 열심히 일하신 덕분에 네 책을 살 수 있다고 아버지께 감사하다고 말하라고 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니 우리의 모든 일상은 모두 남편에게 감사하다는 말 일색이 되었고, 그런 남편은 멋쩍은 듯 우리에게 더 큰 웃음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남편과 함께 장을 보는 것을 생활화했다. 그 동안 남편에 대한 배려로 나는 거의 혼자 장을 봐 왔었다. 그러며 가벼운 것부터 무거운 쌀까지 번쩍번쩍 들어 왔었던 나는 솔직히 혼자 장을 보며 무거운 것을 대신 들어주는 남편이 있는 다른 아내들을 부러워했었다. 그러나 드디어 지난여름부터는 웬만하면 나도 남편과 함께 장을 보게 되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이로써 그토록 내가 바라던 내가 꼭 해보고 싶었던 이 세 가지 목록에 검은 펜을 들고 쫙 그어보았다. 물론 내가 아직 못 해 본 서른일곱 가지 항목이 더 있지만 벌써 세 개나 해 보았으니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웃어본다. 그런데 이를 해보니 어쩌면 이 항목들이 남편도 해 보고 싶었던 항목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편도 웃는 아내가 “돈 많이 벌어 와” 하며 출근하는 길에 배웅해주고, 콧소리 내며 아내가 무언가 먹고 싶으니 사달라고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고 싶다거나 항상 혼자 장 보고 무거운 것을 나르는 아내를 도와주고 싶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 동안 나만 기다린 것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되었다.

남편의 웃음에서 나 혼자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지난 시간들이 어쩌면 남편과 함께였었다는 것을 아주 한참 지난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어떤 상황이든 남편의 일로 기다리는 아내가 있다면 그래서 혼자 기다려 외롭다고 느끼는 아내가 있다면 분명 당신만이 혼자 기다리는 것은 아닐꺼라고, 당신의 남편도 우리 기다리는 아내처럼 다가 올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외롭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나는 기대한다. 내년에는 내 마음의 어떤 항목이 지워지게 될까? 하는 즐거운 상상에 내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김정연
<화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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