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의 일기-승욱이 이야기

2008-12-2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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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명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정확했다. 우산을 챙겨 나왔기에 우산을 깊이 내려쓰고 성북 시각장애인복지관을 찾아가고 있다. 아무리 걸어가도 금방 보인다는 칼국수집이 보이지 않는다. 시청각장애인협회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의 위치를 물어보더니 어디어디를 지나왔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전화를 받으시는 분이 시각장애인으로 알고 있는데…’ 너무 정확하게 길 이름과 심지어 길거리 간판까지 나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비 몇 방울 덜 맞으려고 우산을 깊이 눌러 쓰고 걷다보니 또 건물을 지나쳤다.

점자로 난 도로를 따라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서 모이기로 한 회원들도 조금씩 늦는가 보다. 자원봉사자들 외에는 모두 시각장애인들이다. 회의 장소에 내가 온 것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너무들 반갑게 맞아주신다. 시청각장애인협회라고 하지만 주로 이곳에서 중심역할을 하시는 분들은 시각장애인들이다. 시각장애인분들이 시청각 장애인들의 일들을 돌봐드리고 교육에 관한 일과 복지정책에 관한 일들도 봐주신다.

자리를 정리하니 시청각장애를 가진 자매님과 형제님들이 도착했다. 도대체 이분들이 어떻게 대화를 하는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중도에 시청각장애인이 된 자매님은 손바닥에 한글을 써서 의사소통을 하고 나머지 분들은 특수기계를 이용해서 대화를 이용하는데 컴퓨터 자판 같은 것을 두드리면 바로 점자가 만들어져서 회원들의 대화 내용을 전달받는다. 주로 중도 장애인들이기에 의사소통에 기계를 이용하는 것에 불편함이 있지만 나름 잘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열댓 명이 모였을까 승욱이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이다. 미국에서 어떻게 교육을 시키는지, 어떤 수술을 받았는지, 의사소통은 어떻게 하는지, 인지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등등에 관해 너무들 궁금해 하신다. 승욱이 책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셔서 시각장애인 분들이 보실 수 있게 텍스트로 책의 글들을 보내드리기로 했다.

나도 이 단체가 너무 궁금했다. 어떻게 시각장애인들이 시청각장애인들을 도와 드릴까… 너무 신기하고 의아한 부분이다. 어떻게 이분들이 서로 만나게 되었을까… 과연 몇 명이나 이런 모임에 참석하고 협력하고 있나… 정부에서의 도움은 있는지…

난 궁금한 것이 많아 질문을 계속하는데 점자기에 점자를 쳐서 전달하는 것이 말하는 속도보다 더디기에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꽤 많이 지나가 버렸다. 중요한 약속이 기다리고 있어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연락을 하기로 하고 자리를 일어나서 나오는데 “승욱이 어머니, 여기까지 와 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 나이쯤 되신 단체 회장님이 일어나 인사를 한다. 그리고 난 한 사람씩 손을 잡아드리고 또 가슴으로 그분들을 안아드렸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이때 쓰는 것일까. 회원들 전부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는 분들이다. 그저 내 목소리, 내가 시청각장애아의 엄마라는 이유로 반겨주고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신 것이다.

왜 이리 장애단체들은 열악한지, 복지관 건물에 방 하나를 한 달에 한번 빌려 만나는 분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외출조차도 불편한 분들, 의사소통도 특수기계가 없으면 불가능한 분들, 복지혜택을 위해 같은 장애를 가진 분들이 함께 만나려고 해도 시청각장애인의 숫자조차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힘든 상황. 그나마 이렇게 시청각장애인협회에 나오는 분들은 형편이 조금 나은 분들이라고 설명을 해준 것이 귀에서 계속 울리고 있다.

바람에 빗방울이 흩날려 옷이 온통 젖는 것도 모른 채 생각에 잠겨 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다. 왜 이리 마음에 부담이 생기는 걸까… 내가 그분들에게 지금 해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무 것도 없는데, 내가 뭘 책임질 일을 한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러지? ‘야, 김민아. 너나 잘 살아. 남들은 다 너 걱정해.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도와드려. 승욱이가 잘 되면 그 때가서 다시 생각해.’

나의 마음을 다독이며 우산을 다시 깊이 눌러쓰는데 마음에서 오프라 윈프리의 ‘사명’에 관한 글이 생각이 난다. “남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남보다 아파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남보다 가슴 설레는 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남보다 부담이 있다는 건 강요가 아니라 사명입니다.”

사명입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사명이 있는 걸까? 아, 미치겠다. 내 인생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사명까지 생각을 하는 거지?

김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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