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침묵, 그 아름다운 참회

2008-12-1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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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는 않겠다.’

한암(1876~1951) 대선사께서 한국 불교 조계종 초대 종정을 사시다가, 그 막중한 소임을 다하시고 훠이훠이 강원도 산골로 드시면서 남긴 말씀입니다.

선사께서 남의 말 흉내나 잘 내는 앵무새가 되기보다, 차라리 말을 삼킨 고고한 학이 되어 자취를 감추고자 했던 그 곳은, 바로 말길이 끊어진 자리, 침묵이라는 청정무구한 우리들의 본래 자리일 것입니다.


잠시, 그 앵무새가 되어 어느 독일인 철학자의 침묵에 대한 깊은 사려를 흉내 내어 봅니다. ‘침묵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윽하고 신성한 고향 같은 곳이다. 또한 침묵은 일체의 오성(悟性)을 초월한 평화이다.’

샤카무니 붓다의 궁극적 가르침은 인격의 완성(열반)에 있습니다. 그 인격의 완성을 향한 수행의 도구로 명상(선)은 중요한 방편에 속합니다. 그 명상의 초기과정에서는 세상을 이해하고 구성하기 위해 개념화된 모든 차별적 언어가 소멸된다고 합니다.

동시에 심화된 침묵은 오염된 마음의 부정적인 에너지들을 정화하여, 언제나 마음의 균형과 평온을 유지하도록 하는 힘이 되며, 지혜의 질료가 되어 인격적 위의나 품위를 지니게 만든다고 합니다. 나아가 그러한 침묵은 명상이 지향하는 고차원적 정신현상의 계발에 단초가 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진자리 마른자리 가릴 틈 없이, 휘뚜루마뚜루 만만찮은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은, 그 고향 같은 침묵의 세계를 잃어버린 지 오래인 것 같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고결한 침묵의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종교라는 이름의 성소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러한 종교의 세계에서마저 일부, 너무나 천박하고 비루한 소란들이 성숙한 지적 통제력을 상실한 채, 태연히 자행되고는 합니다.

벌써, 이 해도 붙든 적 없는 세월이 불에라도 덴 듯, 화들짝 서산마루에 걸터앉았습니다.

이쯤에서, 결코 돌아갈 수는 없다지만 돌아볼 수는 있다는 세월이기에, 지르밟고 온 시간들을 되 훑어 마음의 살림살이를 챙겨봐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사람살이 하면서 겪는 아름다운 순간들 중 하나는, 아마도 진솔한 참회의 순간이 아닐까 합니다. 참회는 깊고 그윽한 침묵으로 겸허하고 엄중한 내적 성찰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침묵은 아름다운 참회를 위한 빛나는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침묵은 바로 참회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선업이던 악업이던 매 순간마다 쉼 없이 업을 지으며 삽니다. 삶이 자체로 업이라고도 합니다. 붓다께서는 그 중에서도 알고 지은 악업은 고칠 수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지은 악업은 되풀이하여 지어가기 때문에 훨씬 무겁고 무서운 업이라고 하셨습니다. 더욱이 말은 생명력이 있어 한마디 무심코 뱉어 놓은 말이라도, 그냥 땅으로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특히 경제적 불쾌지수가 높아 심기 날카로운 한해를 살면서, 의식적인 언행은 물론, 자신의 무심한 언행이 타인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기게 한 적은 없는지, 순일한 침묵 속에서 통회의 시간을 가져봐야 할 것입니다. 더하여, 세치 혀로 지은 악업을 정화시켜 준다는 진언이 있습니다.
‘수리수리 마하 수리 수 수리 사바하!’

박 재 욱
(관음사 상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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