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교하는 삶-시계 없는 생활

2008-11-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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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면 시계를 먼저 본다.

서머타임이 끝나고 나니 새벽이 캄캄하다. 눈이 나쁜 나는 머리맡의 안경을 더듬기가 귀찮아서 먼저 깬 아내에게 물어본다. 몇 시야? 안경잡이 남편을 측은하게 여긴 아내가 숫자가 주먹만 하게 나오는 디지털시계를 사다놓았다. 그래도 물어본다. 눈을 아주 뜨면 깨니까. 그런데 몇 시야?

시계 없는 생활을 꿈꾼다. 천천히 일어나고 천천히 자고 천천히 먹고…. 그러나 현실 속의 나는 시간의 노예이다. 아무런 페이먼트의 부담이 없는 홈리스의 삶은 그럴 수 있을까?


하루에도 시계를 몇 번씩 본다. 신경 치료를 지금 시작하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리겠군. 또는, 시간이 지났으니 저쪽 환자는 이제 마취가 되었겠지? 아니면, 오늘 저녁엔 세미나에 가야 하는데 아직도 환자가 많이 남았네.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선교지에 가면 시계를 보지 않는다. 시간대로 일을 하게 되지 않고 사람이 다 모이면 일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선교사님, 내일은 일찌감치 사역을 시작합시다. 몇 시 쯤 일어날까요? 물으면 선교사님들의 대답은 비슷하다. 어차피 해가 있어야 환해서 일을 하실 테니 해가 뜰 때 쯤 나오시면 됩니다.

파푸아뉴기니에서의 일이다. 배에 싣고 간 치과장비가 심한 풍랑을 만나서 다 젖고 말았다. 전기가 있어야 제너레이터를 돌리고 그것이 작동을 해야 치과 기계로 치료를 할 수 있는데 어쩌나? 입고 있던 티셔츠와 단벌 바지조차 물에 흠뻑 젖은 채 우리 팀은 배에서 내렸다. 다행히 배가 뒤집히지 않아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감사한 상황이었다. 할 수 없지요. 짭시다! 우리 팀은 배에서 내려 입고 있던 티셔츠와 바지를 훌훌 벗어서 물을 짜기 시작했다. 어느새 거세던 비바람이 그치고 태양이 찬란하다. 햇빛에 옷을 말려가며 현지인들과 비슷한 차림, 웃통을 거의 벗은 채로 간이 치과를 차린다.

햇빛에 환자들의 입 안을 비춰가며, 해시계가 돌아가는 대로 우리의 몸도 햇빛을 따라가며 그날의 치료를 끝냈을 때, 서쪽으로 붉은 노을을 만들던 해가 수평선 너머로 꼴딱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시계를 보지 않던 행복한 하루였다.

11월이 되면 LA 다운타운에서 홈리스 사역을 하시는 김수철 목사님이나 라주옥 목사님을 따라 나도 홈리스들을 찾아간다. 오피스에서 일하는 간호사들과 그들의 어린 자녀들까지 모여 함께 가는데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밤새 추위에 떨었을 홈리스들과 음식을 나눈다.

음식과 선물을 미리 준비하느라 한 주 내내 바쁘다. 그들에게 전해줄 양말은 양말 도매업을 하시는 요셉 아빠와 웨슬리라는 분이 매년 도네이션을 하신다. 담요는 이불마트에서 지원을 받는다. 그들에게 담요를 전하고 싶은 사람은 10달러를 내면 된다. 커피는 선교회에서 준비하고 뜨거운 닭고기 수프는 매주 담당교회가 바뀌는데 이번엔 로고스교회 차례이다. 바나나도 미리 오더를 해서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다니며 알맞게 익힌다.

이 날은 시계를 볼 필요가 없다. 해가 뜨면 움직이고 음식이 떨어지면 홈리스들과 안녕을 한다. 시계 없이 살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날들을 하루하루 늘려 가면 기쁨으로 채워지는 날들이 일년의 달력 안에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겠지?

김 범 수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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