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눔의 행복- 가야할 때를 아는 이

2008-10-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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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형기 시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낙화’라는 시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난 10월12일 주일, 뉴저지의 한 교회에서 열린 담임목사 이취임식에 다녀왔습니다. 이민 1세로서 미주 한인 한인장로교계 원로이신, 30여년 전 작은 골방에서 단 몇 명의 성도들과 교회를 설립해 1,000명이 넘는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전 담임목사님과 이제 40대 초반의 나이로 그 뒤를 잇게 된 새 담임 목사님간의 이임과 취임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특별 예배였습니다.

예배는 순서를 맡으신 모든 목사님, VIP들이 속속히 도착하면서 오후 4시 정시에 시작되었습니다. 1부 예배를 시작으로 모든 순서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전 담임목사님의 그 동안의 성공적인 목회 및 인생 행보를 증명하듯 많은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배 설교를 맡으신 목사님의 “이렇게 많은 순서를 보고 시험에 들 뻔 했다. 그래서 15분 안에 설교를 마치려 한다”는 재치있는 말씀을 암묵적 약속으로 받아들인 모든 순서 담당자들이 2~5분 내에 자신의 순서를 마쳐 자칫 지루할 수도 있었던 긴 프로그램이 시종 웃음과 여유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이날 순서의 하이라이트인 전 담임목사님의 이임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평생 몸담았던 교회를 떠나는 것이라 분명 감회도 깊고 하시고 싶은 말씀도 많으실 거라 생각했지만 목사님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목사님은 3분여의 시간에 담담하고 함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 이 교회를 시작할 때, 두려움을 안고 안사람과 기도원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30여년이 섬광과 같이 흘렀습니다. 저는 이제 교회를 떠나는 시점에서 제게 필요한 또 다른 인생의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기 위해 그 옛날 올랐던 기도원에 가려고 합니다. 비록 본 교회에서의 사역은 끝났지만, 제게는 가슴 벅찬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이임사입니까? 목회자이기 이전에 인생의 황혼을 맞은 한 인간으로서 은퇴를 또 다른 가슴 벅찬 시작으로 받아들이는 목사님은 결코 노인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을 시작하는 젊은이의 설렘이 목사님의 눈동자에 담겨 있었습니다. 성실함으로 일관된 인생을 살아오신 그 분의 인생이 존경받는 이유를 이임사를 통해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새 담임목사를 위임하는 순서에 다시 등단하신 목사님은 10여건이 넘는 교회재산에 관한 모든법적 문서와 성도 일람 등을 일일이 열거하며, 후임 목사님에게 한 건 한 건 인계하셨으며, “이 순서가 모든 교회의 모범이 되기를 소망합니다”라며 본인의 순서를 모두 마치셨습니다.

이형기 시인은 이렇게 다음 구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한 교회에서 봄 한철 모든 격정을 인내해 내신 목사님은 이제 더 큰 열매를 맺을 사랑하는 교회의 가을걷이를 위해 기꺼이, 너무나 멋진 모습으로 떠나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이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둘러싸인 바로 그때’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셨기 때문입니다. 또 그 결별은 사라짐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선임을 깊이 인식하셨기 때문입니다.

깊은 포옹으로 목사님께 하고픈 모든 말을 대신하고 교회 문을 나서다 뭔가 아쉬움이 남아 돌아본 순간, 다른 사람들과 분주히 작별인사를 하시는 목사님의 뒷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박 준 서
(월드비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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