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귀소본능

2008-10-1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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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에게 원하면 언젠가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고향’은 그래서 좋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못 잊어 한다. 이런 것을 ‘귀소 본능’이라고 부른다.

마치 연어떼가 몇 년 후 자기가 태어나 자랐던 고향을 찾아가듯이, 우리는 아스라한 꿈속의 추억처럼 저마다 고향을 품고 살아간다. 얼마나 고향이 그리우면 큰 대양을 지나 세찬 물결과 역류하면서 비늘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감수할까. 미물인 연어들의 ‘귀소 본능’은 정말 대단하다.

몇 년 전 가족들과 알래스카에서 본, 힘들면 쉬고, 쉬고 나서 다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느라고 비늘들이 벗겨진 맨살로 힘겨워하는 연어떼의 모습이 아직도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인간인 우리는 그 누구도 자기가 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싫든 좋든 자기가 태어난 자리에서 저마다 조용히 한 세상을 살다간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기만의 고뇌를 안고 한 평생을 살아간다. 기쁘면 즐거워 웃고, 그러다가 사는 것이 힘겨워지면 왜 이런 고통 가운데서도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지 회의마저 느끼면서 살아간다.

이처럼 힘겹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인데도, 알고 보면 저마다 마음 속에 ‘그리움’이 존재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애정이라든지, 연인에 대한 그리움, 또는 친구끼리의 우정 같은 것도 있고 저마다 이루어보고 싶은 청운의 꿈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인간은 ‘진 선 미’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도 순간순간 선하고 아름답게 살고 싶은 내적 충동이 인다. 이따끔씩 듣는 사람들의 선행들이 한순간씩 마음에 머물다 사라진다. 진실하게, 착하게 살고 싶어하는 인간들의 마음은 어쩌면 우리가 ‘진, 선, 미’ 자체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귀소 본능’이 아닐는지….

옛날 어떤 외딴 곳에 엄마와 어린 딸이 살고 있었다. 온통 얼굴은 화상을 입어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엄마였지만, 온 생명을 다해 딸을 길렀다. 그런 사랑의 품속에서 어렸을 적부터 자라온 딸에게 엄마의 흉한 모습은 아무렇지도 않게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딸의 친구들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집으로 찾아왔다가 엄마의 흉한 모습을 보고 그만 기겁을 하고 떠나버렸다. 다음 날 학교에 간 딸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과 냉대를 받게 되고 그런 나머지 큰 충격을 입은 딸은 처음으로 엄마의 보기 흉한 모습을 증오하게 된다. 아무리 달래도 문도 열지 않고 며칠간을 괴로워하던 딸이 마침내는 엄마를 떠나 멀리 가고 싶다는 말을 한다.

서러움에 목이 멘 엄마는 결국 “아가, 정 가고 싶으면 가거라. 그러나 어디로 가든 이 하나만은 결코 잊지 말아라. 비록 보기 흉한 엄마지만 나는 너를 내 목숨보다 사랑하며 살아 왔단다”하며 처음으로 왜 그처럼 흉한 모습이 되었는지 들려주는 것이었다. “어느 날 일하다 밤늦게 귀가해 보니, 집이 온통 불길에 휩싸여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단다. 들어가면 죽는다고 사람들이 말렸지만, 뿌리치고 정신없이 불길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 자고 있는 젖먹이였던 너를 보듬고 나오다가 그만 온 얼굴과 머리가 이렇게 익어 버렸단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딸은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목이 메도록 울 수밖에 없었고, 드리어 ‘새 사람’이 된 딸은 엄마의 흉한 얼굴 뒤에 숨겨진 아름다운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양손과 두발에 못이 박힌 채 가시관을 쓰고 피범벅이 되어 처참히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사람들의 눈에는 한낱 조롱거리요 버림받은 비참한 모습이지만, 당신 목숨보다 ‘더’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오늘도 그 품안에서 ‘새 사람’이 되고 싶은 강한 ‘귀소 본능’을 느낀다.

김 재 동
<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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