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각하는 삶 - 삶과 소금

2008-10-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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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1년 로마 교황청은 새로 지은 수도원의 벽화를 그릴 유명한 화가를 찾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제일 유명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불러 예수가 제자들과 더불어 가진 마지막 만찬광경을 벽화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부탁 받은 그는 그림의 모델을 찾아다녔고, 일 년여 만에 예수의 모습을 상징할 수 있는 선한 모습의 젊은이를 구했다.

6년에 걸친 대작업을 거의 마칠 무렵 그는 다시 사람을 찾아 나섰는데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예수를 밀고한 가롯 유다의 모델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로마의 시장이 지하 감옥 속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수백 명의 죄수들 중에서 찾아보라고 제안을 하자 이를 수락한 그는 가장 흉악한 한 사람을 선택하여 마지막 인물의 모습을 끝으로 그림을 완성하였다.
작업이 다 끝나고 그 죄수를 다시 감옥으로 돌려보내려고 할 때 그는 다빈치에게 “자기를 본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만난 적이 없다”고 하자 “저기 저 그림 속에 드려진 예수의 모델이 자기였노라”고 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렇듯 한 인간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선한 모습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악하고 추한 얼굴을 가질 수도 있다는 이 이야기는 자신의 얼굴에 대한 책임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임을 시사하고 있다.

어렸을 때의 얼굴은 부모가 주는 것이지만 성인이 되고 난 후의 모습은 자신이 살아가는 생활철학에 따라 만들어져간다는 것이다. 긍정심과 사랑을 갖고 살아가느냐, 미움과 증오심을 품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욱 아름답게 혹은 더욱 추하게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란 말이다.

진실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 모습과 비윤리적이며 남에게 해악되게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의 모습이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은 자신의 이력서라고 하지 않던가.

다빈치는 이러한 같은 인물이지만 아주 상반된 이미지를 갖고 있는 두 인물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가운데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에 요한과 베드로 그리고 문제의 유다를 ‘최후의 만찬’에 담았다. 예수가 “너희들 중에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라고 일러주는 순간, 성질이 급한 베드로는 곁에 앉아 있는 요한의 어깨를 잡고 누가 배신자인지 알아보겠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막 일어나는 자세로 있는데, 그의 오른손에 잡은 테이블용 나이프는 유다의 옆구리에 닿아 있고 유다는 옆으로 피하려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상 위에 올려놓은 소금 잔이 그의 팔꿈치에 부딪쳐 엎어지고 소금은 상 위에 쏟아져 있다.

왜 하필 소금 잔이며, 그 소금 잔이 왜 하필 유다에 의해 엎어졌겠는가. 이는 괴테가 말했듯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크리스찬의 삶의 방향이라면 그것을 유다가 엎지른 것을 나타냄으로써 ‘배반한 제자의 모습을 통해 멋진 긴장감의 효과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었을 게다.

한 인간의 얼굴이 자신의 삶의 태도에 따라 다른 것은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서로 상대적이기도 해서 부부간의 얼굴도 배우자의 상호 신뢰와 노력에 따라 또한 다른 모습으로 가꾸어지기도 한 것을 보면 얼마나 삶의 태도가 중요한 것이며 더불어 사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배려 또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긴다.

우리의 삶과 소금.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내다 버려라’라고 한 말대로 버려진 소금의 모습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로라 전 <전 건강정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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