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아, 너무 아름다운 공(空)

2008-09-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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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은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다.’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 그러나 통상의 ‘차가운 추상’이 아니라 음악과 같이 사람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뜨거운 추상’을 그렸던 러시아의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 그의 비범한 통찰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것은 젊음을 가진 무(無)다. 정확히 말하면 시작하기 전부터 무이며 태어나기 전부터 무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한 흰색(무)은, 그의 말을 빌리면 ‘내면의 필연성’으로 침묵을 깨고 생명력을 얻게 하는 에너지로 가득 찬 마당으로 이해됩니다.


아득한 옛날 노자(중국 BC 6세기?)라는 현자가 무를 말했습니다. 도(道)를 말했습니다.

‘천하 만물은 유(有)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서 생긴다.’ 노자의 무는 만물을 산출합니다.

‘도(무)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으니…….’ 무를 천지시초로, 시초를 원인으로 본다면 노자의 무는 ‘제1의 원인’(the First Cause)이 됩니다.

그러나 서구의 형이상학은 상반된 주장을 합니다. ‘무에서는 아무 것도 창출되지 않는다. 무는 존재를 형성할 능력이 없는 무정형의 물질이며 따라서 그 자체의 나타남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런데 미국 과학 저술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불리는 K.C. 콜은 무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 바 있습니다. ‘무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고갈되지 않는 창고(꽉 찬 빔)이다. 무는 모든 것의 잠재성이다. 무는 결코 허무가 아니며 잠재력으로 넘친다.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과 잠재성으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물리학계의 견해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우주의 근본적 성질을 모두 더하면 0이 된다. 즉 우주 전체는 음(ㅡ)과 양(+)의 입자들로 완벽하게 상쇄되어 무가된다. 따라서 우주는 거대한 하나의 영이다.’

이러한 언표는 역으로 조건만 맞으면 영(무)에서 유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학의 영(zero)은 그 어원이 공(sunya)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sunya)이란 단어는 ‘부풀다’라는 동사를 어근으로 합니다. 그래서 공은 어떤 조건에 부합되면 물리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정신작용인 사랑이나 자비심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은 물론, 분노와 탐욕, 고통과 같은 거칠고 부정적인 감정들로 생기 가능한 가능태, 잠정태, 공능으로써 에너지적 존재입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완성된 인격(열반)을 성취하는 데에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정신작용을 포함한 모든 존재와 현상들을 요소들이 서로 의존하고 있는 일시적 가화합체로 보기 때문에, 자아나 자존적인 실체를 부정합니다. 고통 등은 그 ‘나’의 고정관념에 의한 자기 이해인 편견과 이기심이 낳은 탐착이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 없어져 고통과 번뇌가 소멸된 공의 자리는 텅 비었으되 ‘함께’로 충만하기에, 그것은 구원이며 해방이요, 완성이며 동시에, 필연적으로 무한한 자비가 끝없이 생성되고 발현되는 역동적인 자리이기도 합니다. 텅 빈 충만! 해서, 공은 아름답습니다.

헌데, 그런데 말입니다. 허허! 이것 참. 전해야 하나? 그래, 공 또한 공입니다. 그래서 공은 위 없는 지고의 아름다움입니다. ‘절대 선(善)’입니다.

박 재 욱
(관음사 상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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