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 일상, 깨달음- 까마귀 선생님

2008-09-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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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 가면 제법 살이 통통한 까마귀 가족들을 흔하게 보게 된다.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고 다가오는 까마귀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곤 했다.

‘왜 미국같이 풍요로운 나라에 기분 나쁜 까마귀떼가 이리도 많단 말인가?’ 온몸이 새카만 까마귀를 보면서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져 손을 휘휘 저어 쫓거나 멀리 피하곤 했었다. 같은 ‘까’자로 시작되는 까치는 조상적부터 한국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데 까마귀는 흉조로 불릴 뿐 아니라 까마귀를 빗댄 많은 속담까지 있는 것을 보면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까마귀에 앨러지가 있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속담에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까마귀가 울면 그 날엔 운이 꼬인다’ 등이 있다. 건망증이 심한 사람을 보면 ‘까마귀 고기를 잡아먹었느냐’고 말한다. 특히 ‘오합지졸’(烏合之卒)이란 단어를 보면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까마귀를 싫어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우두머리가 없고 각기 지내는 무리를 빗댄 말에 까마귀 ‘오’자를 앞에 넣었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노아홍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까마귀가 싫었었다. 생명을 구원해준 은혜도 까맣게 잊은 채 죽은 시체에 정신이 팔려버린 배은망덕한 짐승…. 까마귀를 보내놓고 애타게 기다렸던 노아 할아버지의 가슴은 아마도 까마귀 같이 새카만 색깔로 타버렸을 거란 생각에 괘씸죄(?)까지 추가했다. 밝은 것을 좋아했던 낙천적인 성격도 한몫해 까마귀를 더욱 터부시했다.


그런데 나이 먹고 목사 사모로 살아가면서 그렇게 싫었던 검정색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신만만했던 자아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서 ‘블랙’은 오히려 자아의 참 모습을 보게 하는 긍휼의 색상으로 다가왔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인생의 참 기쁨을 발견하면서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로 인해 오히려 더 깊은 은혜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썩은 고기만으로 배불렀을 내 인생에 영원한 생명을 주심에 감격해 그저 까만 색깔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졌다.

까마귀의 또 다른 특징이 심한 건망증이다. 먹을 음식을 지푸라기 속에다 감추고는 어디에다 두었는지 몰라 끝내 못 찾아먹는 모습이 욕망에 빠진 미련한 인간을 닮았다. 기억해야 할 은혜와 사랑, 감사와 복을 너무 자주 잊고 불평과 원망으로 지내는 ‘까마귀 인생’이 우리들 아닌가.

좋을 때는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라고 금방 교만해지고, 나쁠 때는 하나님도 무심하시다고 온 몸으로 불평을 토해내다가도 위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간사한 마음.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까마귀 고기를 먹은 사람처럼 그 일을 놓고 기도했던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리는 우리네 인생들이 서글프다. 그것을 깨우쳐 주려고 선지자 엘리야를 살려내는 역할을 부정한 새로 여겨졌던 ‘까마귀’에게 맡긴 것 아닐까? 추한 내 모습과 관계 없이 오직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인생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배려하신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었을까?

까마귀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조류보다 현저하게 시력이 낮다. 그래서 높은 곳을 쳐다보지도 않고 아래쪽에만 시선을 두고 멀리 보지 못하기에 눈 좋은 새들이 먹지 않는 죽은 짐승을 먹게 되었단다. 바로 멀리 보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일에만 온통 시선이 집중되어 조급해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현대인들의 모습 같다.

몸이 많이 아팠던 요즈음 하나님께서는 매일 아무 일 없이 눈 뜨고 일상을 시작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기적임을 ‘까마귀’ 묵상을 통해 깨닫게 하신다. ‘아, 하나님!’ 나도 모르게 터져온 절대희망의 감탄사를 외치는 오늘 아침의 태양이 황홀하다.

정 한 나
(세계선교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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