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 일상, 깨달음- 베이징 올림픽의 뒤안

2008-08-29 (금)
크게 작게
1994년 중국의 허난성의 수도 정저우(정주)의 한 병원에 65세의 가오야오지에(약칭 ‘가오’)라는 여성 의사가 허난성의 한 농촌 상차이현에서 온 두 명의 아낙을 진찰실에서 만났습니다. 그녀는 많이 놀랐습니다. 허난성은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성들에 속했고, 따라서 허난성의 농부들은 보통 병원에 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200km나 떨어진 거리의 상차이현에서 환자가 오는 일은 희한한 일이었고, 더구나 그 두 아낙은 에이즈 환자였던 때문입니다.

정저우를 제외한 허난성 각 현의 농촌에는 의사도, 병원도, 보건소도 없었습니다. 농부들은 병 들면 약초뿌리에 의존하지만 그래도 치료가 되지 않을 때는 조용히 죽어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아낙은 반복되는 열 때문에 견디다 못해 죽음의 공포감에서 먼 곳까지 의사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에이즈라니! 가오 의사는 그 때까지 에이즈 환자를 본 일 없었지만 오랜 의사생활의 직감으로 그것이 에이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외딴 농촌에 에이즈 감염환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두 여성을 살피다가 팔의 무수한 주사바늘 자국을 발견하고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피를 팔아왔던 것입니다. 두 아낙은 1980년대부터 10여년간 매주 두 번 피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 상차이 사람들 중 일부였습니다. 피장사들은 그 농촌사람들로부터 1인당 400ml의 피를 뽑고 10위안(1.25달러)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영악해져 특수한 기술을 도입, 매혈현장에서 뽑은 피를 기계에 넣고 원심분리를 시켜 혈장만 뽑아내고 혈구와 혈소판이 남은 피를 다시 농부들에게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피값을 절반으로 깎았습니다. 그들은 경비를 아끼기 위해서 오직 하나의 주사기만 사용하였고, 되돌려주는 피의 찌꺼기를 통해 에이즈가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허난성 농부 수십만명 중 다수가 에이즈 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가오 의사는 즉시 이를 허난성의 공산당 지도부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러자 당국은 가오에게 “입을 다물라”고 지시하고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상차이현을 봉쇄했습니다. 상차이현이 허난성의 지도에서 없어졌습니다.

당국은 에이즈를 몹쓸 병이라고만 했고, 세계보건기구에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몹쓸 병이 위대한 중국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체면을 깎이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환자들에게 돈을 쓸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가오 의사는 그날부터 감시와 조사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오는 영리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외국 기자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녀는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베이징 정부도 그녀를 숙청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수백만의 에이즈 환자가 생겨나자 1996년에 매혈을 중단시켰고, 2000년에야 에이즈를 중국의 병으로 인정하고 조치를 취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상차이현에 급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아직도 가오 의사는 생명을 건 젊은 학생 둘을 데리고 새벽 달구지 포장 밑에 숨어 상차이에 드나들지만 할 수 있는 일이란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로하고 가족들에게 감염을 막는 방법을 일러주는 것이 고작입니다.

베이징 올림픽! 당국은 이번 올림픽에 3,000억위안(47억달러)이란 거액을 쏟아붓고 대기 정화를 위해 4차례 인공강우까지 내리게 하면서 세계강국의 이미지를 심는 일에 바빴지만, 중국의 뒤안은 너무 어둡습니다. 올림픽 때문에 중국의 13억 서민들, 56개의 소수민족이 치러야 했던 통제와 희생은 엄청난 것입니다. 중국의 올림픽 개최가 배 아파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계인들이 베이징 올림픽을 즐기는 것만큼,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진정한 면에서 조금씩 나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송 순 태
(해외동포 원호기구 운영위원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