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 독립의 역사

2008-07-0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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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7월 4일은 제 233주년째 되는 미국 독립기념일이다. 미국 독립 기념일을 맞이하여 미국 독립의 역사와 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다.

1)미국 독립 혁명의 시초
영국 본토의 식민 정책에 대해서 식민지인들은 차를 밀수입하고 영국 상선에 의해 수입되는 차에 대해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본국 정부는 1773년에 새로이 茶法(Tea Act)을 제정하여 동인도 회사에 차 수입의 독점권을 주는 동시에 면세혜택을 주었다.
식민지인의 불만이 커 필라델피아, 뉴욕 등에서 동인도 회사의 차의 하역을 거절하였다. 보스턴에서는 일부 급진분자들이 인디언으로 가장하여 영국선을 습격하여 동인도 회사의 차 15,000파운드를 바다에 던졌다. “보스턴 차사건(Boston Tea Party)”이라 불린 이 사건에 분격한 영국 정부는 강경수단을 취하기로 하였다.
곧 1774년에 ‘강제 제법’이라 불리는 여러 법령을 연달아 만들어 보스턴 시민이 배상금을 내고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봉쇄하고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국왕의 직속으로 하고 매사추세츠의 재판에 영국의 감독을 보내고 때에 따라 영국 군대를 민가에 유숙시키기로 하였다.
또 퀘백법을 제정하여 캐나다에 퀘벡 지방에서 오하이오 강에 이르는 땅에 구교를 승인하고 배심제가 아닌 사법 제도와 대의제 의회가 없는 정치제도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통신위원회의 활동에 의해 1774년 9월 조지아를 제외한 전식민지의 대표가 필라 델피아에 모여 제 1회 대륙회의를 열어 본국과의 통상을 끊고 본국 상품을 배척하기로 결의하였다. 본국에서는 Pitt가 타협안을 의회에 제출하였으나 부결되었다. 1775년 4월 보스턴 서쪽의 콩코드에 있는 무기고를 파괴하기 위해 파견된 영국군의 일부가 렉싱턴, 콩코드에서 식민지의 민병과 충돌하여 독립전쟁의 불꽃이 일어났다.
이에 식민지 대표들이 5월에 필라 델피아에서 제 2차 대륙회의를 열어 ‘무력에 호소하는 이유와 필요의 선언’을 결의하여 본국 정부에 그 회답을 요구하였다. 본국에서는 에드먼드 버크, Pitt the Younger 등, 위그당의 지도자들이 화해를 꾀하였으나 국왕과 수상 North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자 대륙회의는 버지니아 출신 죠지 와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전쟁 태세를 갖추었다.

2) 혁명의 경과 및 결과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어 본국과의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때까지 주저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도 독립파측에 가담하고, 충성파는 절망하여 영국군의 보호를 구하고 혹은 영국, 캐나다로 도망하였다.
또 독립선언의 발표는 여러 나라의 자유 애호자의 환영을 받아 국제 정세를 변하게 하였다. 1777년 10월 미국은 사라토가의 싸움에서 영국의 대부대를 항복시켜 전쟁은 미국측에 유리하게 되었다. 이에 영국과의 식민지 전쟁에 패배한 프랑스가 숙적 영국에 보복할 좋은 기회가 왔다 하여 외교사절로 와 있던 벤자민 프랭클린의 제안을 받아들여 1778년 미국과 통상 및 동맹조약을 맺었다.
이어서 에스파니아, 네덜란드도 미국에 가담하였다. 다시 1780년에는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2세가 영국 해군의 무역 방해에 대하여 무장중립를 제창하여 덴마크, 스웨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등의 지지를 얻었다.
1781년 10월 영국군이 지키고 있던 요크 타운이 함락되었고 1783년에 맺어진 파리조약에서 미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인정되었다.
1776년 전쟁중에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일컫는 토마스 제퍼슨이 기초한 것이었다.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7월 4일은 미국의 독립 기념일로서 가장 중요한 국경일로 되어 있다. 독립선언은 그 뒤 프랑스 혁명 때 인권선언과 더불어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310)968-8945
키 한
뉴스타 부동산 토랜스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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