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숨통이 트이니 마음도 가볍고

2008-06-06 (금)
크게 작게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 <이정아씨>

2‘장승마을’ 케치칸

방배정을 받은 후 방에 비치된 오렌지색 구명조끼를 입고 갑판에 모여 조난대비 훈련을 받았다. 단단히 훈련했으니 오래 전의 영화에서와 같은 비극은 없기를 소원하였다.


훈련 후 배는 시애틀 항구를 출발하여 캐나다 서부와 알래스카를 연결하는 인사이드 해안을 따라 밤새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날도 종일 항해를 하는 일명 시 데이(sea day)이다.

배에서는 승객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작은 음악회를 열거나 영화 상영을 한다. 이번엔 한국인들끼리 극장을 빌려 노래자랑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국인은 풍류를 가라오케로 과시하는지 열기도 실력도 대단했다.

아침과 점심은 14층의 부페에서 먹었다. 식당까지 가기 싫으면 전날 룸서비스에게 메뉴를 말하고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청할 수 있다. 저녁은 정식 만찬을 하였고 옷은 정장과 드레스를 입는 날이었다. 식후엔 선장의 환영인사와 함께 메인 라운지에서 칵테일파티가 있었다. 한국인들 중에는 예쁜 한복을 드레스 대신 입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사진 모델이 되는 분들도 계셨다. 그날그날의 배 안의 이벤트와 드레스 코드는 매일 방으로 배달되는 뉴스레터(princess patter)로 밤사이에 전달된다. 일주일 중 닷새는 캐주얼 코드였고 이틀은 포멀이었다.

장시간 배를 타니 첫날부터 뱃멀미가 왔다. 배 안의 잡화점에서 멀미(sea sickness) 약을 사서 먹으니 조금 진정이 되었다(잡화점의 처녀는 sea sickness를 못 알아듣고 motion sickness라니 알아들었다). 배 멀미에 대비하여 미리 약 처방을 받아온 분들도 계셨고 귀 뒤에 붙이는 약을 붙이신 분들도 계셨다. 나는 일주일 내내 이름도 멋진 멀미약 ‘드라마마인’(dramamine)을 먹었다.

멀미 때문에 신선한 공기를 찾아 배 안의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14층의 데크는 유람선에서 가장 분주한 곳이다. 넘치는 음식이 있고 바가 있으며 경쾌한 음악과 실내수영장과 자쿠지가 있다. 비치 의자가 수없이 있어서 누구나 낮잠을 자고 독서를 하며 담소하고 탁구를 치기도 한다. 그 중 반층 높이 걸린 반원형 무대는 내가 가장 선호하는 장소였다. 가끔 서브 미싱의 탁구공이 튀어오기도 하나 사람 구경도 할 수 있고 책도 읽을 수 있는 명당이었다.

탁 트인 이 공간에서 놀멘 놀멘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면서 제임스 미치너의 ‘작가는 왜 쓰는가?’를 읽고, 아프가니스탄의 망명작가인 호세이니가 쓴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었다. 하나는 어려워서 한 권은 두꺼워서 미뤄두었던 것인데 잘 읽혔다. 내 생애에 이런 멋진 시간들이 있을 수 있다니 황홀하였다.

세 번째 날 알래스카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마을인 케치칸(Ketchican)에 당도하였다. ‘날개를 편 독수리’라는 뜻을 가진 오래된 장승마을이다. 그래서 그런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장승에는 모두 날개를 편 독수리 모형 조각이 달려 있었다.

케치칸은 민물과 바다가 만나는 연어가 회귀하는 곳이다. 철이 아니어서 연어 떼를 보지 못했으나 연어 색으로 칠해진 건물들을 보고 그 자취를 상상해 보기도 하였다. 알래스카 그 동네에선 주황에 가까운 핑크색을 연어색(salmon color)이라고 통칭한다고 투어 버스의 운전사가 말한다.


예전 공창이었던 달리 하우스(Dolly House) 건물을 살려두었는데 그 안의 여성들까지 재현을 해놓아 민망했다. 속옷 바람의 진한 화장의 여인들이 허벅지에 찬 레이스 밴드에 돈을 끼우고 비좁은 골목을 돌아다닌다. 좁은 길은 기념품 상점과 난전으로 복잡하다. 이곳에서 남편은 알래스카라고 새긴 리버서블 후드 점퍼를 사 입었는데 싼 대신 바느질은 깔끔하지 못하였다. 역시 메이드인 차이나였다. 그 전날 밤에 뉴스로 중국 대지진 소식을 들었기에 이것도 돕는 일이다 생각하고 군소리 안하고 샀다.

배로 돌아가기까지의 자유시간이 널널하기에 산꼭대기의 케이프 폭스 라지(Cape Fox Lodge)로 가는 케이블카를 탔다. 일인당 2달러를 내면 데려다 준다. 깨끗한 식당과 커피 점과 휴게실이 있었다. 인터넷 시설도 있어서 배 안보다 아주 싼값으로 메일을 체크 할 수 있었다. 배 안은 1분사용에 75센트인데 이곳은 30분에 3달러50센트의 사용료를 낸다.

라지의 식당 메뉴를 보니 값이 무척 비쌌다. 무료로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배 안의 식사를 두고, 돈을 내고 먹으려니 아깝긴 하였으나 전망도 좋고 음식 맛도 좋아서 후회가 없었다. 풀코스로 시키지 않고 애피타이저로 클램 차우더를 시키고 메인으로 해프 랙(돼지갈비 반 사이즈)을 시키니 양도 좋고 가격도 적당했다. 클램 차우더는 여태껏 먹은 것 중 가장 훌륭했다. 케치칸의 케이프 팍스 로지는 꼭 권하고 싶은 장소이다.

네번째 날은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빙하와 빙산을 보는 날이다. 트레이시 암(Tracy Arm)이라는 빙하계곡을 배가 지나면서 구경을 하였다. 피요르드 해안엔 희다 못해 푸른 빙산이 빨래 뭉치처럼 떠다닌다. 눈에 보이는 건 15%이고 바다 속에 감추고 있는 게 더 많은 세월의 덩어리들이다. 그 수 만년 역사 사이를 배가 지나다니는 것이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11만톤의 위용은 하찮은 것이었다. 4,000명이 승선한 떠다니는 호텔이자 큰 기업은 북태평양에 찍힌 점에 불과하였다. 인간이 아무리 크고 멋지다 강조한들 작고도 작을 뿐이었다.

피요르드 빙하 지역을 지나다니던 배가 알라스카의 주도인 주노(Juneau)에 정박하여 육로로 맨덴홀(Menden Hall) 빙하지역을 투어 하였다. 주노는 작지만 아주 깔끔한 도시였다. 배에서 빙하 사이를 다닐 때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하더니, 주노에 하선하니 빗줄기는 더욱 세차졌다. 모두들 하얀 비닐 우비를 뒤집어쓰고 빗속을 떠다녔다. 떠다니는 건 빙산만이 아니었다. 여행준비물 중에 우산을 준비하라는 이유를 알았다. 빙하의 생성과정을 비디오로 보고 몇 만년 된 빙산 조각도 만져보았으니, 우중에 고생을 하였으나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경험을 한 셈이다. 빙산은 커다란 얼음 덩어리일 것으로 상상했는데 잘 들여다보니 입체퍼즐처럼 촘촘하게 얽힌 얼음 결정이었다. 마치 세월이 얽혀있는 듯하였다. 단단하고 쉽게 녹지도 않는다고 한다. 빙하 속에서 나왔다는 조개로 만든 브로치 장식을 하나 샀다. 몇 만년 전의 숨결을 만난 셈인가?

비 때문에 시내관광을 못하고 일찍 배로 돌아와선, 비오는 갑판과 조깅 트랙을 우산을 쓰고 혼자 거닐었다. 이 운치 있었던 시간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