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 ‘새끼 나귀’와 봉사자

2008-04-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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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즈가리아’서를 보면 구세주께서 ‘새끼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쓰여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 후로 돈 있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새끼나귀를 집에서 기르는 관습이 생겨났다. 언젠가 세상에 오실 주님께서 자기집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을 고대하는 마음 때문이리라. 그들은 자기네가 기르는 새끼나귀를 주님께서 쉽게 보실 수 있도록 집 앞에 ‘메어놓고’ 기다리며 지냈다. 그 예언대로 어느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길거리에 나가 메여 있는 새끼나귀를 ‘풀어’ 데리고 오라고 명하신다. 나귀 주인이 “왜 남의 나귀를 가져가는 것이요” 라고 묻자, 심부름꾼인 제자는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라는 한 마디를 남긴다.
새끼나귀의 주인은 오랜 세월 기다려온 구약의 예언이 자기집 새끼나귀를 통해 이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끌려온 새끼나귀를 타시고 예수님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외쳐대는 군중의 환호 속에, 당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왕’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이날 새끼나귀는 주님의 ‘발’이 되어 인류구원 사업에 동참한다. 힘겹지만 묵묵히, 등에 타신 ‘주님’만을 생각하며 길거리의 환호소리에도 정신 팔지 않고, 또박또박 충직하게 주님이 가시기 원하시는대로 최선을 다하여 걸어가고 있다.

그는 보무당당하게 보란 듯 으스대는 명마의 모습도 아니고, 주위 사람의 환호소리에 방정을 떠는 당나귀의 철딱서니 없는 모습도 아니다. 그저 순하디 순하게, 콧김을 싱싱 불면서도 혹시나 주인이 눈치챌까봐 힘들지 않은 척 다소곳이 고개 숙이며 두 귀와 온몸으로 주인의 원하시는 ‘뜻’을 놓칠까봐 노심초사 발걸음을 옮겨 딛는 새끼나귀의 심성을 주님은 좋아하신다. 그러기에 윤기 자르르 흐르는 볼품 있는 명마도 마다하시고, 오직 애송이처럼 착하고 순한 ‘새끼나귀’를 골라 타고 험난한 구원 사업의 대장정에 오르셨던 것 아닐까.


교회의 ‘봉사자’가 되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구원 사업에 동참했던 새끼나귀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교회에 봉사하도록 부르심 받은 ‘봉사자’는 먼저 새끼나귀마냥 그 심성이 ‘착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착하다고만 되는 것일까. 새끼나귀마저도 말뚝에 ‘매여’ 있으면 주님께서 쓰실 수 없었다. 봉사자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마음이 팔려 명예와 재물과 환락에 목을 ‘매고’ 있는데 주님께서 어떻게 쓰시겠는가. 주님께 ‘쓰임’을 받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매고 있는 끈을 ‘풀어야’ 한다.

요즈음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물질이 넘쳐나도록 풍요로워졌다. 살기 편하고 재미있는 세상이 되자, 온통 젊은 영혼들이 ‘세상 것’에 매여 버려 신학교와 수도원들이 텅텅 비어가고 있다. 천상의 아름다움과 하느님 사랑에 취해 잠 못 이룰 어린 청소년들의 영혼들마저 자라기도 전에 세속의 올가미에 ‘매여’ 버리기 쉬운 세상이 되었다.

서글프고 안타까울 뿐이다. 마치 예수님의 명을 받은 제자들이 매여 있는 새끼나귀의 끈을 풀어왔듯이, 오늘의 ‘교회’도 세상의 길가에 정신 팔려 ‘매여 있는’ 수많은 영혼들의 끈을 ‘풀어’ 주님의 손과 발이 되도록 데려와야 할 것 같은 다급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정말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세상’이니 말이다.

김 재 동
<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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