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아름다움을 엮어낸다

2008-02-0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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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방 공예 바느질 클래스

조선시대 규수라면 어림없는 소리다. 수강료를 내고 바느질을 배운다는 것. 그러나 지금은 세상만사 급변하는 첨단시대, 손바느질이라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규수들이 대부분이다. 하긴 재봉틀로 드르륵 박으면 끝나는 세상에 손바느질을 한다는 건 여간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전시회에 걸려 있는 조각보 작품을 보면 나도 한번 해볼까 싶다가도 가만히 앉아 한 땀 한 땀 뜨는 모습을 보면 엄두가 나질 않는다. 빠름보다는 느림의 문화인 은근함과 인내가 자리 잡고 있는 손바느질.
우리의 옛 여인들의 멋과 지혜를 익히는 서른여섯 동갑내기 이수연, 박영씨를 무향거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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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마음 맞는 이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모임일 수도 있지만 자투리 천 조각 하나하나를 이어 조각보를 만드는 과정은 은근함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무향거 바느질 클래스에서 김봉화씨에게 바느질을 배우고 있는 이수연씨(오른쪽)와 박영씨.


자투리 천 모아 조각보·바늘꽂이·모시 상보·골무·예물보
바늘 잡은 지 3개월만에 만든 아들 개량 한복 볼수록 탐 나

“어쩌면 저렇게 고울까 싶었죠. 모시며 옥사에, 명주 조각조각 서로 다르면서도 기막히게 어울리는 은은한 색상들. 그야말로 밝고 환한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죠.”
박영씨가 바느질을 배우기 시작한 계기는 이탈리아에서 함께 유학했던 친구의 전시회를 보고 나서다. 2년 전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친구가 서울의 중요 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졸업전을 한다기에 아무 생각없이 들렀는데 그 곱디고운 색깔들의 잔치에 홀딱 반했다.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온갖 웹사이트와 잡지를 뒤져 겨우 무향거(Casa Muhyang) 바느질 클래스를 찾아 전통 바느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바늘 잡기조차 서툴러 손가락을 찌르기 일쑤였지만 기초 3개월 과정이 끝나자 내 작품이란 게 생겼다.
“선생님(김봉화씨)이 내주는 바느질 숙제를 열심히 하다 보니 실력도 늘고 욕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지난해 세 살짜리 아들 개량한복 저고리를 만들어봤죠. 타운 프리스쿨을 다니다보니 한복을 입힐 기회가 많아 돌복을 입혔는데, 매번 아들이 감촉이 싫다고 투정을 부렸거든요. 선생님의 조언을 받으며 꼬박 한달 반 만에 실크에 옥사조각보로 밑단을 장식한 저고리를 완성했죠. 천이 부드러우니까 아들도 너무 좋아합니다.”
조각보로 조그맣게 만든 단추가 돋보이는 개량한복 저고리는 볼수록 탐이 나는 작품이었다. 이외에도 박영씨의 집엔 모시, 삼베로 지은 식탁 매트며 아이의 간식 덮개, 어머니 용돈 드리는 돈보 등 색실과 조각보로 만든 생활용품들이 가득하다고 했다. 궁중 조각보의 화려한 원색 조합이 주는 품위와는 또 다른 그윽하면서도 발랄함이 느껴지는 색감에 집안은 물론 가족들의 삶 자체까지 밝아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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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로 장식해 벽에 걸어놓아도 정 말 예쁘다(위). 화려하면서 진중한 기품이 서린 김봉화씨의 규방공예품.

어떤 예술작품보다 아름다워
바느질 하는동안 우리 옛 여인들의 끈기·인내심 저절로
완성품 보며 고운 색깔들의 잔치 감상에 나도 몰래 홀딱

각기 다른 천의 색깔 배합을 기가 막히게 하는 이수연씨는 바느질을 배운지 이제 3개월이 지난 초보이다. 여고시절 수업시간에 미니 한복을 만들어본 이후 처음 맘먹고 해본 바느질인데 이젠 홈질은 눈 감고도 하고 감침질, 쌈솔, 그 어렵다는 꼬집기까지 척척 해낸다.
“남이 해놓은 작품을 보면 너무 예쁘고 쉬워보여서 시작하지만 정말 끈기와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에요. 스승님은 한 땀 한 땀 기도하고 명상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하는데 정말 쉽지 않았죠. 하지만 요즘은 바늘을 들면 한두 시간은 어떻게 지나가는 줄 모르죠.”
한국에 갈 때마다 인사동을 즐겨 찾는다는 수연씨는 전통가구점에 진열된 조각보를 보면 하나 갖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너무 비싸서 엄두가 나질 않았다. 컴퓨터 홈페이지 만들기가 소일거리였던 그녀는 갈수록 조각보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물어물어 찾아간 무향거에서 그녀는 기초 바느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만든 조각보 작품이 바늘꽂이였고, 모시 상보, 옥사 다보, 골무, 둥근 바늘꽂이, 예물(돈)보 등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조각보의 구성미에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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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겐 밥상보 같은 실용의 가치보다 감상이나 장식의 의미가 더 커요. 규방공예 가운데서도 조각보는 특이 대중적이고 아름답죠.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대가 몬드리안의 구성 작품과는 비교도 안 되는 품격을 갖추고 있잖아요. 이젠 천연재료 염색이 너무나 배우고 싶어요.”
천연재료로 염색을 하고, 그것을 모아 색을 맞추고, 바느질을 하는 그 지난한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즐거움과 재미로까지 승화시키는 작업이 규방공예이다. 그런 각오가 아니라면 작품 하나에 일 년도 넘게 걸리는 작업을 감당하기 힘들다.
그냥 마음 맞는 이들이 모여 세상사나 나누는 모임일 수도 있지만, 자투리 천 조각 하나하나를 이어 커다란 보자기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를 담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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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수연씨가 바느질을 하는 모습이 조선시대 양갓집 규수를 떠올리게 한다.

무향거 바느질 클래스 문의 (323)934-4992 웹사이트 casamu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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