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웰빙 이야기-남은 것으로 일구는 새해

2008-01-19 (토)
크게 작게
1995년 링컨 센터에서 있었던 바이얼리니스트 이츠학 펄만(Itzhak Perman)의 이야기입니다.
소아마비로 거동이 불편한 펄만이 크러치를 짚고 천천히 무대에 나왔습니다. 연주석에 앉아 바닥에 크러치를 내려놓고 다리 브레이스를 풀고는 한 발은 뒤로 밀어 넣고 한 발은 앞으로 하여 연주할 포즈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지휘자에게 준비신호를 보냈습니다.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탁 튀기는 소리와 함께 펄만의 바이얼린 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오케스트라도 멈췄습니다. 관중은 펄만이 브레이스를 다시 매고 크러치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뒤로 가서 바이얼린에 새 줄을 끼고 나올 것을 기대하며 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펄만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습니다. 끊어진 줄이 늘어진 바이얼린을 왼쪽 어깨에 놓으면서 지휘자에게 시작신호를 보냈고 연주는 시작되었습니다. 펄만은 전조를 하고 자리를 바꾸고 재창작을 해가면서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추어 3줄의 바이얼린으로 협주곡을 끝까지 해냈습니다.
감격에 찬 청중은 연주가 끝났어도 숨소리조차 없이 조용했습니다. 얼마 후에야, 청중들은 펄만에게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땀에 흠뻑 젖은 펄만은 바이얼린 활을 들어 박수를 그치게 한 다음, 차분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남은 것으로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참다운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다르긴 하지만 우리도 늘 크고 작은 것들을 잃으면서 삽니다.
나이로 인해 건강이 나빠지고 예기 하지 못한 때, 상상도 못한 일로 배우자, 집, 가정, 직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다행이도 잃고도 남는 것은 있습니다. 산불로 집은 잃었지만 아직도 식구들이 같이 살고 있습니다. 공장에 불이 나서 가장을 잃었지만 남은 가족들이 있습니다.
지나던 배의 기름 노출로 서해안 사람들이 생계를 잃었지만 도움의 손길은 있습니다. 가진 것을 몽땅 털어 산 증권이 형편없이 떨어졌지만 아직도, 10분의1 값어치는 남아 있습니다.
중풍으로 쓰러졌지만 반신은 움직일 수 있고 신경통으로 병뚜껑을 열 수 없지만 부탁해서 열어 줄 사람은 옆에 있습니다. 약해지고 없어지는 치아, 시력, 청력이지만 희미하게나마 보고 듣고 맛을 알 수 있습니다. 어이없는 이혼과 자녀들의 탈선으로 허전하고 괴롭지만 아직도 사물을 판단할 능력은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재난이나 잃는 것을 막아주시지는 않았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하느님의 임재를 느끼고 힘을 받은 경험과 고백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잃으면서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라면, 남은 것으로 새로운 길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은 것이 옛것과는 다르고 터무니없이 부족해도 내 창의력과 노력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작품, 질이 다른 삶은 분명, 세상의 빛으로 이어지는 길이 될 것입니다.
펄만이 모든 사람의 기대대로 새 줄을 갈아 끼고 훌륭한 연주를 했더라면 음악가로서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준자
<사모>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