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주 ‘열혈청년’들의 연대 어학당 수학기

2008-01-0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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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열혈청년’들의 연대 어학당 수학기

연세대 어학당에서 바비 테일러(왼쪽), 이장혁(가운데), 임성빈(오른쪽)군이 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어학당 입구에서 포즈를 취했다.

어머니 나라서 사랑을 배우다

2세들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또 그들에게 부모란 어떤 존재감으로 가슴에 박혀 있을까. 이미 부모와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진지 오래고 그 소통의 부재만큼 서로의 존재감도 희미한 것이 사실이다. 같은 언어를 공유한다고 해도 머리 굵어질수록 이들이 부모와 속내 털어놓으며 미주알고주알 친구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은 그리 흔한 풍경은 아니다. 그러나 내리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민 1세로서 부모들의 고충과 애환을 옆에서 지켜봐 온 2세들은 표현이 서툴뿐 가슴 짠한 연민과 애정, 사랑, 존경심이란 단어를 묻고 커왔던 듯싶다. 1세들이 몰랐던 사실들을 새삼 눈물겹게 가르쳐 준 이들은 바로 서울 연세대 어학당에서 재학중인 바비 테일러(24), 이장혁(25), 임성빈(24)군. 여전히 몸에 배지 않은 서툰 한국어로, 그러나 지구상 그 어떤 말보다 아름다운 언어로(비록 더듬거렸을지라도) 가슴 벅차고 뜨거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난 12월 이제 막 추위가 시작된 서울, 연세대 어학당에서 이 ‘열혈청년’들을 직접 만나봤다.

한국문화 익히며 부모님 이해하게돼 기뻐
좋은 친구 만날 수 있었던게 가장 큰 수확


왜 한국에 왔을까

겨울 햇살이 가득한 연대 어학당을 찾았을 때는 학생들이 가장 분주하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점심시간. 각국에서 몰려온 한인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더러 피부색이 다른 이들도 눈에 띄었다.
갈수록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2세들이 늘어나고, 꼭 한국이 아니더라도 한국어 수요가 늘면서 어학당은 해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어렵게 점심시간에 시간을 낸 이 청년들은 복도에서 혹은 식당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며, 한국어로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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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혁 “한국 문화와 생활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 깨달았어요”
-두 살 때 도미
-뉴욕 거주
-빙햄턴 유니버시티 졸업, 경제학 전공
-서울 거주 2년
-한국어 실력 1급
-현재 파트타임 영어강사

“어학당 안에선 100% 한국어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제 자신 스스로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어차피 한국어를 배우러 왔으니 말하고, 읽고, 쓰고 하려면 지독하게 노력해야겠죠.”(이장혁·이하 장혁)
그러다보니 가장 한국어 실력이 서툰 테일러군에겐 그냥 편하게 영어로 이야기하라 해도 막무가내 서술어와 목적어를 바꿔가며, 어색한 발음으로 어떻게든 의사소통을 하려고 한다. 기특하다 못해 이들의 한국어 학습과정은 눈물겨웠다.
“엄마를 이해하고 싶었어요. 한국 음식도 잘 먹고, 어느 정도 한국말을 이해할 순 있었지만 조금씩 철들고 나이가 들면서는 엄마의 깊은 속내까지 이해하고 함께 나누고 싶어서 어학당에 오기로 한 것이죠. 더 늦으면, 더 사는 게 바빠지면 이렇게 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바비 테일러·이하 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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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비 테일러 “엄마의 깊은 속내까지 함께 나누고 싶었어요”
-네 살 때 도미
-애틀랜타 거주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
-조지아텍 졸업, 항공우주공학 전공
-서울 거주 6개월 

“한국말 잘 하는 여자와 결혼하고파”

한국, 이래서 매력적


반년짜리 왕초보에서 2년차 최고참(?)까지 이들의 서울 생활기는 아직까지는 신기하고 즐거운 일들이 더 많아 보였다. 아무리 미국식 음식과 문화에 익숙하다고 하지만 이들의 태생은 한국인이 아니었던가.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었었던 게 가장 큰 수확입니다. 그리고 운이 좋았겠지만 너무 착하고 좋은 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 행복했고요. 맞다. 밤늦게까지 거리를 돌아다녀도 안전한 것도 서울이라는 도시의 매력이 아닌가 싶어요.”
‘서울 예찬’이 시작되자 서로들 눈 마주치며 그간의 에피소드며 유쾌했던 경험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맛있는 한국음식을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어 너무 좋고 주변 곳곳에 편의점이며 구멍가게들이 있어 편리해요. 그리고 여학생들도 참 예쁘잖아요?(웃음)”(장혁)
그렇다고 마냥 서울이 이 미주 청년들에게 결코 익숙하고 편안한 도시만은 아니다.
“거리에서 어깨를 치고 지나가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고 복잡하고 경쟁이 심해 적응이 안 되기도 해요.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들도 한국의 한국인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어쩌면 내 안에도 그런 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성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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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빈 “너무 착하고 좋은 이들을 사귈 수 있어 행복했어요”
-두 살 때 도미
-애틀랜타 거주
-조지아 주립대학 졸업, 경영학 전공
-서울 거주 6개월
-현재 파트타임 영어강사

한국에서 배운 것들

“이젠 부모님이 이해돼요. 한국 문화를 이해하면서, 한국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그 깊이만큼 부모님을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이젠 왜 그 당시 부모님이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 상황에서 왜 그랬었는지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장혁)
이들이 한국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것을 꼽아 보라 하니 1초의 주저함도 없이 ‘부모에 대한 이해’를 꼽았다.
한국문화를 이해하면서 왜 한국 부모들이 교육에 집착하는지, 자식의 출세니 성공에 유난스러운지도 알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제는 부모님과 싸우기도 합니다. 옛날엔 한국말도 못하니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했죠. 그러다보니 의견충돌이 있다 해도 그냥 무시하는 게 태반이었지만 이젠 한국 부모자식 지간처럼 충돌도 하고 그러면서 조정하는 법도 배워가면서 훨씬 사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장혁)
장혁군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을 나타낸다.
“이젠 엄마의 인생을 다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원래 계획은 1년도 채 안되게 체류할 예정이었는데 조금 더 한국어를 한국 문화를 배우고 싶어서 조금 더 있을까도 고려중입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평생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까 싶은 거죠.”(바비)

서울생활, 나를 한국인이게 해줘  

결코 길지 않은 한국생활이지만 이들에게선 어쩐지 조금씩 ‘한국인’ 티가 나기 시작한다. 하루 4~5시간의 수업이 끝나면 이들 역시 생활인으로 생업전선(?)에 나서야 한다.
대부분 미주에서 온 학생들이 그렇듯 영어 아르바이트가 대부분. 개인교습에서부터 대기업 영어 강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어 강의가 이들의 파트타임 대상이다.
“일단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데 그나마 영어 가르치는 것이 가장 쉽게 일을 구할 수 있고 보수도 좋아 많은 학생들이 선호합니다. 또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국을 한국 문화를 더 잘아 갈수도 있고요. 사실 학교에서 배우는 언어보다도 그냥 서울에 거주하면서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혹은 식당을 이용하면서, 백화점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셈이죠.”(성빈)
가끔 멀쩡한 한국말을 못하는 이들을 못마땅한 듯 쳐다보는 이들도 간혹 만나게 되긴 하지만 이들에게 한국은 따뜻한 어머니 나라이며 지금과는 다른 소속감을 느끼게 해 준 곳이다.
“지금까지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제는 한국말을 능숙하게 잘 하는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요. 부모님과도 이야기가 잘 통하고 내 자녀들에게도 한국어를 가르쳐 줄 수 있게 말입니다. 가족이란 그런 게 아닐까요.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것 말입니다.”(장혁)
서울 생활을 통해 이들이 터득한 건 한국어가 아닌 가족에 대한 소중함이 아닐까 싶다. 이민 1세대로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옆에서 지켜봐 누구보다 잘 알지만 한 번도 사랑한다고 표현 못해본 부모와 이들은 이제 조금씩 화해하고 다독거려가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었다. 참 사랑스럽지 않은가. 우리의 청년들이.

글·사진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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