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 바라보기-새해에는 나에게 관대하지 말자

2007-12-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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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해의 마지막에 서 있는 나. 언제 이렇게 모든 날들이 다 가버렸는지 갑자기 내 시간을 통째로 도둑맞은 느낌으로 멍하니 달력을 본다. 그러며 올 한해의 첫날을 생각해 보니 내가 다짐해 놓은 새해의 소망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매해 첫날마다 계획을 세우고 또 적어도 보았는데 도대체 나는 365일 동안 무엇을 한 것일까. 이렇게 365일 365일 지나다보면 내게 남는 것이 무엇일까 하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는 나를 걱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다 나의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실은 나와 친한 언니의 홈페이지에 가서 언니가 써 놓은 독백 같은 글을 읽고서 나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언니는 나에게 갖는 관대함이 나의 적이 될 수 있다고 적어 놓았다. 그 글을 읽은 나. 이제까지 나는 나의 좋은 점은 낙천적인 면이고, 그 때문에 남편의 오랜 공부기간도 잘 참은 거라며 웃어왔는데 그런 내가 그 글을 읽고 마치 어두운 방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누군가 불을 켜서 한 동안 그 밝은 빛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그런 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한참 그 밝은 빛에 넋을 잃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처럼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나의 낙천적인 면이 나의 적이었다고.
처음은 충격 먹은 듯이 생각해 보았지만 솔직한 나와 마주하니 나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늘 오늘만은, 내일하면 되지, 다음에, 조금만 더, 괜찮아, 이러며 나를 느슨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은가? 당장 나는 그림을 빨리 그려 내년 봄이 오기 전에 대학병원에 넘겨주어야 하고, 오늘만은 또 무슨 오늘만인가? 이런 내가 나를 나태함의 연속으로 만들어가고 있는데. 그리고 다음에 하면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당장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미국에서 평생 살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오늘 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먹고 나면 내일 아침 거울에 보름달이 떠 있을 테고, 그러면서 내일하면 되지가 뭐가 내일하면 된다는 말인가? 당장 이 원고를 넘겨야 부장님이 안도의 숨을 쉬실 텐데 말이다.
이제까지 그런 나를 향한 관대함에 대하여 하나 둘 생각해 보니 적나라한 내 모습에 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래! 이제 나의 관대함은 일 년 후로 미루어보자. 내가 나에게 베풀어 왔던 관대함 대신에 나를 내조해 보자. 우리 여자들은 늘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렇게 나를 제외한 내 가족만 내조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번 다가오는 새해만큼은 나를 위해서 여러 관대함을 잠시 잊고 나를 내조해 본다면 아마도 내년 이맘때면 적어도 지금의 나는 서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괜찮다, 괜찮다, 나는 괜찮다 말하며 수많은 세월 동안의 수많은 아내와 내 어머니들은 자신을 희생해왔다. 그러나 그 희생은 가족들과 자신에게 온전한 기쁨으로 다가가지 못했던 것 같다. 괜찮다하며 남은 음식만 먹고, 오늘만 하며 허리를 펴지 못한 채 평생을 그렇게 일만하였고, 나는 다음에 하며 늘 허름한 옷차림으로 여자임을 잊고 지내며 배우고 싶은 공부도 많이 못한 분들이 우리 어머니들이다. 아니 우리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여자들의 자신에 대한 관대함은 아마도 어머니의 고귀한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우리 세대에도 또 다른 모습으로 미덕이 되어버린 것 같지만 이제는 우리가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올해만큼은 자신의 관대함을 버리고 나를 내조해 보고 싶다. 그러면 더 나아진 내가 내 가족을 더 잘 내조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의 올해 목표는 나에게 향해 있던 나의 관대함을 버리는 것이다. 새해에는 나에게 관대하지 말자. ‘꼭! 그래보자’ 하고 말이다.

김정연
<화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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