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2007-11-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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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넘어 나를 넘어

우리는 세상살이 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서 수없이 방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삶이란 외로운 선택의 연속이라고도 말합니다.
그 해야 할, 수많은 선택 중에서도, 자신의 소중한 일생을 걸어야만 하는, 일대사의 크고도 엄숙한 선택을, 자의든 아니든 강요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면서, 삶의 지침이 되어 주기도 하는 이런 말씀이 성경에는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험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그 선택해야 할 문 앞에서 우리들은 주저 없이 넓은 문을 택하기도 하고, 때로는 감당해야 할 결과를 생각하며 선택에 앞서 한 없이 서성거리기도 합니다. 대부분 우리 범부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쉽고 넓은 문의 문고리를 잡아당기고야 맙니다.
그러나 험하고 좁은 문을 선택한 바보(?)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성직을 가진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그 좁은 문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영광스러운 생명의 문임을 알기에 기꺼이 그 길라잡이를 자청한 분들입니다.
하지만 그 도정에서, 헌신하고 오욕을 극기해 나아가야 하는 인욕의 세월이 결코 만만찮습니다.
오욕이란 명예욕, 재욕, 식욕, 수면욕, 성욕, 이 다섯 가지 인간의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을 말합니다. 모든 종교의 성직자들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마는 특히, 독신을 종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종교의 성직자들은 단호히 이 다섯 가지 욕망을 포기한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성직자들에게 가장 극복하기 힘든 것이, 이 다섯 가지 욕망 중에서도 성적 욕망이라고 합니다.
조금은 불경스러운 이러한 익살이 있습니다.
어느 날 교수 스님이 생뚱맞게도 학승들에게 왜 젊은 여신도들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학승들은 일제히 수행에 방해가 되니까, 유혹하니까 라고들 하면서 다투어 나름의 답들을 내어 놓습니다. 결국 교수 스님이 해답을 주십니다. ‘그야, 좋으니까!’ 오욕은 불교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며, 깨달음이란 이 욕망의 소멸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금욕은 단순한 윤리적 금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직자의 도덕적 권위와 종교적 카리스마의 원천이며,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을 구분 짓는 종교적 상징이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직자들은 위엄과 엄숙함이 깃든 위의(威儀)를 갖추어야 하며, 이 위의를 지닐 때라야, 신자들로부터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됩니다. 그러한 신뢰와 존경은 일견, 세상을 위해 개인의 본능적 욕망마저 포기함으로써, 자신을 극복한데 대한 종교적, 사회적 보답이라고도 합니다.
위의는 칼날 같은 계율의 준수, 즉 엄격한 지계에서만 저절로 스며 나오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혈육화로부터 계체(戒體)라는 것이 형성됩니다. 자체로 계체가 된 그 푸르고 맑은 얼, 그로부터 성스러움과 신비함마저 우러나온다고 하겠습니다.
‘Beyond Limits’, 욕망의 벽을 넘어 나를 넘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그 ‘위대한 바보’들의 숭고하고도 빛나는 얼들이 살아 있기에, 그나마 이 풍진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돌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박 재 욱 (로메리카 불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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