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2007-11-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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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베이비시터

요즈음 사회는 맞벌이 부부가 많은 때문인지 베이비시팅을 맡기는 일이 잦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은 아이들은 베이비시터들이 집안에 들어서면 으레 칭얼거리게 마련이다.
이 세상에 엄마만한 사람이 또 있을까. 제아무리 아이들을 살갑게 대해주는 베이비시터들이라도 해도 무언가 다른 모양이다. 그 누구도 엄마의 따스한 가슴과 눈빛을 지닐 수는 없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품안이 천국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모세를 통해 물려받은 ‘율법’이 제 아무리 인간을 올바르고 의롭게 지켜준다 하더라도 어쩐지 부담스럽다. 그래서 그런지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은 단지 우리가 올바르고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후견인 노릇을 합니다.”(갈라디아서 3장24절)
엄마가 집에 돌아오면, 그간 애들을 돌봐준 베이비시터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율법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기에 이제는 후견인 역할을 한 율법도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소리다.
그렇다고 율법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절대 아이다. 이집트의 호된 종살이에서 풀려나 무법천지(?)인 광야에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어울려 평화롭게 지내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했을까. 바로 유일신을 섬기는 신앙과 공동생활에 필요한 법과 질서가 아니었을까.
구약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다. 그 후 모세와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더 잘 지키기 위해 많은 세부적인 법과 규정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안식날에는 사람이 아파도 함부로 고쳐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수백 가지의 불필요한 규정까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본래 사람들을 의롭고 경건하게 지켜줄 후견인 역할을 위해 제정된 하느님의 율법이 잘못 사용되어 당신 백성을 짓누르고 괴롭히는 데 사용되었다. 율법의 정신을 깨우쳐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싸우셨다. 율법의 주인이신 그분은 제자들에게 율법의 기본정신을 분명히 밝히셨다.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의 기본 정신이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확한 사랑의 법인가. 이처럼 율법의 정신은 바로 ‘사랑’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을 없애려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려 왔다고 말씀하신 것 아닐까.
십자가상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죽음을 택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무거운 짐이 되어 온 율법의 완성으로 새로운 계명을 주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장34절)
이 한 말씀으로 모세 이후로 수천년간 인간에게 후견인 역할을 해 온 율법이 본래의 기본정신인 ‘사랑’으로 되돌아가 완성을 이룬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이 없어 죄의식도 없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법 없이 자기 멋대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율법의 강요 대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법이 두려워 마지못해 율법을 지키는 피동적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그분과의 사랑이 좋아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법을 따르고 싶은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분명 어린 자녀가 엄마가 집에 돌아왔을 때 느끼는 기쁨과 행복, 바로 그런 것 아닐까.

김 재 동 <의사·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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