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2007-10-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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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음담(?)

‘앞산의 저 딱따구리는 생나무도 잘 뚫는 데, 우리 집 저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누나.’
구한말 몰락한 궁중의 상궁들에게 당대 최고의 선지식 만공(1871~1946) 선사께서 격식에 구애됨이 없이 시시로 펴는 소참법문 중 난데없이 던지신 농도 짙은 음담(?)입니다.
젊은 상궁들은 입술을 깨문 채, 어른 상궁들의 눈치를 살피며 삐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말아 삼킵니다. 그러나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웃음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그만, 눈물을 찔끔대며 아랫배를 부둥켜안은 채, 이리저리 뒹굴고야 맙니다. 지엄하신 어른 상궁들의 입가에도 물고 있던 엷은 미소가 배어나옵니다. 그 미소는 젊은 상궁들의 일탈을, 은연 중 방기한다는 징표가 되어, 가일층 그들을 무너지게 만듭니다.
청상(靑孀) 아닌 청상들!
평생 한 번 입을까 말까한 지존의 망극한 성은이야 애당초 물 건넌지 오래일터. 에라, 그래 이 판에 그놈의 법도가 대수일까. 웃자 웃으라. 아녀, 차라리, 차라리 목을 놓아 울어나 볼거나.
노선사의 망정인 게지, 잠시 심기가 허해 새어나온 헛소리인 게지, 아니지 마군의 장난인 게지, 아니지, 아니지 천부당만부당한 소리. 도대체 그 노장이 뉘신가.
마조(중국 당나라 709-788) 선사는 마음이 곧 부처다. 즉 ‘심즉시불’임을 천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심외무불’ 즉 마음 밖에 부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말은 깨달음의 씨앗, 또는 부처가 될 종자나 성품인 불성이 이미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 너는 이미 구원 받은 몸이다. 부처는 결코 마음 밖에서 찾아야 할 비밀이 아니라, ‘뚫린 구멍’으로서 존재하는 집안일이라는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 대부분이 무명에 가려, 그 복된 소식을 한사코 믿으려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뚫려 있는 구멍’도 못 뚫는 멍텅구리가 되어 부처 찾아 삼만 리. 홀연, 머나먼 길을 나섭니다. 자신의 심신이 부처될 종자를 싹틔울 성스러운 자궁임을 알지 못한 채, 죄 없는 심신을 쥐어짜거나 갈기갈기 헤집는, 터무니없는 고문을 자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도 작용할 때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작용 이전의 그 ‘모습 없는 모습’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비심비불, 그것을 ‘뚫려 있는 구멍’ 즉 ‘부처의 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작용하는 마음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생각은 에너지이며 다만, 그 에너지를 잘 통제하여 세상을 향해 자비와 이타심, 자기헌신, 등 항상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게만 한다면, 그 자리가 바로, 집 안에서 찾아야 할 그 자리라고 합니다.
어느 이름 모를 비구니 스님은 그 ‘뚫린 구멍’이 이미 주어진 집안의 소식임을 이렇게 전한 바 있습니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도 봄은 보지 못한 채/ 짚신이 다 닳도록 온 산을 헤매었네./ 봄 찾는 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니/ 매화나무 꽃가지에 봄이 한창인 것을.’

박 재 욱 (로메리카 불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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