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낯선 묘지 돌보는 망자의 벗

2007-10-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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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묘지의 천사’ 김로마노씨

그는 신문의 부고기사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누가 죽었나”를 살피며 하루를 시작한다. 각종 사건기사 혹은 미담기사에서조차 사망자 신원에 가장 먼저 눈이 가고, 정확한 정보가 나오지 않으면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는 누구보다 라미네이팅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좋은 글, 감동 스토리가 있으면 스크랩 해두었다가 새벽 두세시까지 라미네이트 작업을 한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대부분 그의 서신을 받아본 적이 있는데, 자기가 쓴 기사나 칼럼이 얼마쯤 후에 빳빳하게 코팅되어 배달되는 것이다.
그는 또 매일 우체국에 가는 사람이다. 그의 메일링 리스트에 올라있는 800여 유가족들에게 때마다 고인들의 기일을 알리거나 위로가 될 글들을 챙겨 보내느라 매일 수십통의 봉투를 들고 우체국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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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로즈힐스 공원묘지를 방문한 로마노 김씨가 한인 신자들의 묘지를 청소하고 있다. <김장섭 기자>>


묘지 20곳 때때로 찾아가 손질
장례식 과정·묘지 상태 찍어
유족에 보낸 편지만 1만통
선행불구‘이상한 사람’취급도
“하느님이 알아주시면 그만”

김로마노(52)씨.
그가 하는 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처음에 그를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 아무도 그가 하는 일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아마도 전세계에서 유일무이할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을 한마디로 설명할 단어를 찾기가 힘들다. 누구는 그를 ‘망자의 벗’이라고도 하고 ‘공원묘지의 천사’라고도 하지만 가장 적절한 단어를 고른다면 ‘묘지 자원봉사자’라고 할 수 있을까. 남가주 일대의 공원묘지 20군데가 다 그의 구역, 발길 닿는 대로 다니며 한인들이 묻힌 묘지만 보면 벌초해주고 청소해주는 일을 올해로 13년째 하고 있다.
95년 8월27일 친동생의 사고사가 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날 이후 동생 또래의 총격피살자가 있으면 묘지를 찾아가 돌보는 것으로 자가치유를 시작했다. “동생 같은 젊은이 한번이라도 더 쓰다듬어주고 싶다”는게 묘지 봉사의 시작이었다. 그러다 자신이 다니는 성당 교우들의 묘지를 찾기 시작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종교를 떠난 모든 한인들의 묘지로 확대되었다. “어느 날 보니 목사님, 사모님, 전도사님, 스님들도 찾아가게 됐고, 지금은 월남사람, 미국사람, 남미사람까지 챙기고 있어요. 죽음 앞에서 사람은 다 평등하잖아요.”
최근에는 올해초 큰 누나가 뉴저지서 돌아가셨을 때 폭설 대란으로 못 가뵌 아픔이 그대로 새로운 묘지사랑으로 이어지고 있다. 웨스트LA와 리버사이드의 국립묘지까지 찾아다니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는 것. 이라크에서 전사한 한인들의 묘지도 하나씩 찾아내 정성껏 돌보고 있다. 김신우 상병, 김루이스 기술병, 김장호 일병… 하나같이 귀한 외아들이란 점이 김씨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묘지 관련 봉사를 하다보니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만도 150번. 유가족이 울고불고 하는 동안 장례과정을 이모저모 챙긴 사진을 찍고 유족들이 돌아간 후까지 남아 흙 다지는 과정을 사진에 담아 유족에게 메일링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시로 다니며 묘지 상태를 점검해 알려주기도 하니 유가족보다 묘지를 더 자주 찾는 경우도 있다. 특히 운전 못하는 노인들 대신 가봐주고 사진 찍어다 보내주는 일은 무엇보다 큰 보람이다.
묘지 방문은 주로 주말에 하고 있지만 평소에도 생활화되어 있다. “락스미스 출장 나갈 때마다 그 지역의 공원묘지에 반드시 들렀다 옵니다. 그냥 지나가면 섭해요.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는 것과 같지요. 한번이라도 더 밟아주고 싶거든요. 내 차 트렁크에는 코팅한 명단과 묘지 관리 장비가 상비돼 있답니다.”
남들 안하는 일을 하는 탓에 오해받는 일도 드물지 않다. 돈을 바라고 하는 일인가 하는 유족들의 눈초리도 따갑지만 장례관련 업자들로부터는 노골적인 외면과 ‘방해’ 작업도 겪는다. 돈은커녕 장례식에 그렇게 다녀도 밥 한번 얻어먹은 적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그는 생업(구두수선과 열쇠수리)과 봉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순수한 봉사자다. 가끔 고맙다고 전해주는 유족들의 도네이션조차 선교기금으로 보낼 정도로 우직하게 봉사정신을 지키고 있다.
그는 매일매일의 묘지 봉사활동 일지를 꼼꼼히 기록하고, 묘지를 하나 더 찾아낼 때마다 그의 ‘고인사랑 서신’ 리스트에 올린다. 지금까지 리스트에 기록된 사람이 800여명. 이들에게 감동적인 기사나 휴먼 스토리를 라미네이팅 하여 틈틈이 우송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보낸 라미네이팅 편지가 10월22일 현재 8,935통째. 그러나 기록을 남기기 전에 보낸 것들까지 합치면 1만통을 훌쩍 넘어선다. 우표 값만 한달에 300~400달러를 쓰고 있으니, 묘지 봉사에 대한 그의 특별한 열정을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다. 처음에는 도시락 싸갖고 다니며 말리던 아내 티나 김씨도 이젠 포기한 것일까, 남편의 ‘사명’에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됐다. 김씨의 특이한 선행은 미국사회에도 알려져 올해 2월 이본 버크 LA카운티 수퍼바이저로부터 사회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사람들의 공치사는 제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위에서 하느님이 내가 하는 행실 보고 잘 한다고 해주시면 그게 전부지요.”
조용한 공원묘지를 돌아볼 때마다 그는 인내를 배우고 겸손을 배운다. 묘지 찾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 끝없이 펼쳐져 있는 묘비들 사이를 헤매다 보면 바로 어제 찾아왔던 묘지를 오늘 못 찾는 일도 있고, 공원 문 닫는 시간이 지난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다 갇혀버리는 일도 겪는다. 그리고 그렇게 망자들 사이를 다니다 보면 살아있음에 매일 감사하게 되는 것 역시 그만이 얻는 크나큰 수확. 김 로마노·티나 부부는 가든 그로브에서 ‘로만스’ 열쇠 구두 수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주소와 연락 번호는 8203 Garden Grove Bl. Garden Grove, CA 92844 (714)903-0148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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