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윤실 호루라기

2007-10-16 (화)
크게 작게
단기 선교, 단기 사랑

뉴멕시코 주에서 미 원주민 선교를 하는 남창식 선교사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그곳에 여름마다 단기선교를 하러 오는 학생들과 ‘한 사람 사랑 운동’(Love One Movement)을 펼쳐 왔다. 학생 한 사람씩 인디언 마을에 가서 한 명의 인디언을 정해 어떻게 사랑하고 섬길 수 있나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런데 이번 여름에는 그 운동을 벌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인디언들이 작년에 자기 집에 왔던 학생들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 학생 가족들의 냉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남 선교사는 “우리는 네 자식을 재워 주었는데 왜 너희는 우리를 재워주지 않느냐”는 인디언들의 항의 앞에서 한인들이 ‘사랑’ 운운하는 것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인디언들이 원했던 것은 장기적인 사랑이었는데 한인 학생들이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단기적인 사랑뿐이었습니다. 인디언들이 원했던 것은 무제한의 사랑이었는데 우리 학생들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제한된 사랑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선교의 한계라고 생각했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공유함으로써만 가능한데 삶의 자리가 어차피 다른 인디언과 한인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주로 청년들 중심으로 선교지에 여름 동안 가서 하는 ‘사랑놀음’은 그래서 한시적이고 조건부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학생들은 단기 선교 기간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오고 피선교지의 사람들도 선교팀들이 돌아간 이후에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단조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한인 선교가 장기 선교사 파송에서 단기 선교 중심으로 그 추세를 바꾸어 가는 것이 이 삶을 섞는 작업의 어려움을 한인 교회가 자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파송교회의 입장에서도 여름마다 선교팀들이 선교 현지에 가서 은혜 받고 돌아오면 교회 일을 더 열심히 하기 때문에 단기 선교가 교회의 부흥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장기 선교사를 파송하면 그 선교사의 사역과 생활, 가족의 미래까지 파송교회가 신경을 써야 한다. 다시 말해 교회의 부흥과는 직접적 연결이 되지 않는 곳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문제는 이곳 이민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모습에서도 아주 잘 나타난다. 선교가 고통받는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라면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이웃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바로 자기 업소에서 일하는 멕시칸을 ‘멕작’이라고 경멸하면서 우리는 멕시코에 단기 선교를 하러 가고, 흑인이라면 상종도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아프리카에 선교를 떠나고, 수많은 조선족들에게 매일 상처를 주면서 중국 조선족 자치구에 선교를 한다고 법석을 떤다.
멀리 있는 형제들과는 제한적이고 단기적인 조건부 사랑만 하면 되는데, 이곳에서 만나는 소외된 자들과 괜히 섞였다가는 어떠한 귀찮은 일을 만날 줄 모른다는 계산을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한국 선교가 단기 선교 중심에서 장기 선교 중심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곳에 가서 살지 않으면 삶을 섞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단기 선교는 장기 선교사나 원주민 사역자들의 요구와 지도에 따라 그들을 돕는 일만을 해야 한다. 더불어 주변에 있는 소외된 이웃들을 우리가 당연히 챙겨주어야 한다.
가까이 있는 이웃에게는 매일 상처를 주면서 멀리 있는 이웃만 사랑하겠다는 모순에서 이제는 우리 모두가 벗어났으면 한다.
(기윤실 실행위원)

박 문 규 (캘리포니아 인터내셔날 대학 학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