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2007-10-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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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신학

신학자가 아닌 나는 ‘생존신학’이라는 용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실은 잘 모른다. 그러나 생존신학이라는 말을 나는 사랑한다. 그것은 신앙은 나의 생명 자체이며,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시는 공기가 없으면 내 육신이 살 수 없듯, 신앙이 없으면 내 영혼과 심령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앙은 나의 생존이며, 이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나에게는 생존신학이 될 수밖에 없다.
하찮은 인간끼리도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지면 더 살 맛이 없어지는데, 영원에서 영원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시는 그 좋은 하느님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힘으로 더 살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부족한 우리의 흠 하나까지 다 알고 계시면서도, 그래도 부족한 흠투성이 인간이 좋아, 우리를 찾아 죄악의 불길 속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신 그 사랑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으며, 그 좋으신 주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 또 있겠는가.
비록 마시는 공기처럼 항상 나와 함께 계시기에 소중한 공기를 의식 못하듯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낼 수는 있다 해도, 막상 공기가 없어져 버리면 불과 5분도 못 돼 질식해 죽어버리듯 사랑이신 그분이 안 계시면 우리 영혼이 어찌 단 5분인들 지탱할 수 있으랴! 신앙은 그래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장식품이 아니다.
여가로 집 뒤뜰에 야채나 토마토, 감자 등을 심고 재미로 가꾸는 집이 있다. 이것은 대부분 소일거리로 하는 일이어서 틈이 나고 마음이 내키면 물도 주고 가꾸나, 바쁘다 보면 그나마도 잊어버리고 지낸다. 그리고 열매가 열리면 따먹고, 안 열리면 안 먹어도 좋다. 그래서 취미 삼아 농사를 짓다보면 정성도 안 생기고 마음에 절실함이 없다.
그러나 농사가 생명인 농부의 마음은 다르다. 그것은 농사가 농부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온 가족의 생존이 달린 농사이기에 마음이 내키든, 내키지 않든 상관없이 온 정성이 쓰인다. 혹시라도 밤중에 비바람이 내리치면 자다가도 절로 눈이 뜨여 노심초사 잠들 수가 없다. 행여나 농작물에 피해가 올까봐 한밤중에도 일어나 앉아 안절부절 못하거나, 우비를 걸치고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도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서성거리게 된다. 이것은 여가로 뒤뜰에 밭농사를 지으며 심심풀이로 사는 사람과는 천양지차다.
결국 인생 삶의 모든 것은 내 마음에 얼마나 절실하게 각인 되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 때문인지 많은 경우 부잣집 자식과는 달리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는 학생이 때로 학업에 일심전력으로 매달리는 경우를 주위에서 볼 때가 있다. 그것이 아마 생존본능 때문인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가 말해주기도 전에 스스로 공부를 잘 하지 않으면 살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마음의 열림 자세가 바로 생존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생존으로 이어질 때 농부는 자다가도 눈이 떠지고, 공부하는 학생은 눈꺼풀이 풀려 가는 졸음 앞에서도 버티고 밤새 공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신앙도 마찬가지다. 왜 신앙생활에 힘이 없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그것은 신앙 생활을 여가로 생각하며 살기 때문이다. 여가로 여기며 살기 때문에 절실한 마음이 없어 마음과 몸이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기쁨과 힘이 없다. 그러나 신앙은 결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삶의 장식품이 아니다. 내 삶 자체의 본질이며, 내 존재의 모든 것이 바로 신앙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생존신학이라는 말이 참 좋다.

김 재 동 <의사·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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