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920년대 한국 아직도 생생”

2007-10-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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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스 선교사 105번째 생일
“한국 사랑 변함없어… 복음 퍼져 감사”

1928년부터 41년까지 철원, 개성, 의정부 등에서 선교를 담당했던 빅터 피터스 선교사.
1902년에 태어나 9월29일 105번째 생일을 맞았다. 지금도 패사디나에서 정정하게 살고 있는 한국명 피도수 목사를 축하하는 잔칫상이 30일 드림교회(담임목사 이성현)에서 열렸다.
피터스 선교사는 인사말을 통해 “한국을 너무 사랑했고, 한국으로 선교를 가 오히려 내가 복을 더 많이 받고 왔다”며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이 복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물론 또박또박 한국말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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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피터스 선교사가 드림교회에서 105번째 생일파티에서 축하 케익을 받고 있다.<사진 제공 드림교회>>


캔사스가 고향인 피터스 선교사는 1928년 2월12일 프린스턴 신학교 주일예배에서 ‘한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 즉시 남감리회 선교부에 연락을 해 파송 결정을 얻었다.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부모에게 편지를 썼더니, 아버지도 같은 음성을 들었다고 전했단다.
피터스 선교사는 시애틀에서 출발해 한 달간 배를 타고 28년 8월29일 부산에 도착했다. 79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한국 생활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26세 청년에게 한국에 대한 첫 기억은 파란 하늘, 흰옷 입은 사람, 지붕 위에 널린 빨간 고추다.
피터스 선교사에게 한국 생활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서울 사직동에서 거주하면서 한인수 목사에게 한국어를 배워, 한달 후에는 길에 나가 모르는 사람과 인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고. 28년 12월7일에는 용산교회에서 한국어로 설교할 수 있었다. 다음해 4월엔 천안교회 부흥회를 인도했고 안식년을 제외한 12년간 한국 선교를 위해 봉사했다.
이외에도 예배 중에 일본 순사에게 끌려갔던 일, 부친이 보낸 준 헌금으로 김화에 마부인 기념예배당을 직접 설계·건축한 일…. 마치 한편의 역사 드라마를 읊조리듯, 옛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전국을 돌며 집회와 사경회를 인도하며 복음을 전파하던 피터스 선교사는 38년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의 한흥복과 국제 결혼을 했다. 당시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국제결혼이라 교회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화젯거리가 되었다.
동료 선교사들까지도 반대한 이 결혼식은 한사연 목사의 주례로 피터스 선교사가 담임목사로 있던 김화읍교회에서 베풀어졌다. 한국 선교를 위해 철저히 한국인이 되기 위해 애쓰던 피터스 선교사로서는 국적을 초월한 결혼이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었다고.
일제 말기 선교사에 대한 탄압으로 1941년 1월 부득이 한국에서 쫓겨났다. 피터스 선교사는 해방 후 즉시 귀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사디나에 머물면서 나사렛교회 원로목사로 봉직하였다. 75년 이화여대 90주년 기념행사 때 부인과 함께 한국을 다시 찾았었다.
피터스 선교사는 한국에서 활동할 당시 한복과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 서양 주택을 마다하고 한국식 주택에 살면서 한국 음식을 즐겨 먹었고 한국말로 유창한 설교를 구사할 수 있었다.
피터스 선교사는 8년 전 아내를 잃고 혼자 지내고 있다. 거동에 약간 어려움이 있지만 책을 보거나 이야기를 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시력과 청력은 양호하다. 그림 그리기 재능이 있는 그는 지금도 성경 이야기, 한국 풍경, 한복 입은 예수, 가족 모습 등을 화폭에 옮기고 있다.

<김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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