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 일상, 깨달음

2007-09-2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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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의 계절입니다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추석날 밤 뒷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행복한 노랫말이 정겹기만 했다. 며칠 비가 내리더니 어느새 가슴까지 시원한 가을바람이 폐부까지 느껴진다.
가을하면 떠오르는 것이 많이 있다. ‘추석, 보름달, 풍요로움, 감사, 편지, 결실, 농부…’ 그 중에도 숨은 농부의 땀방울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다. 처음 이사 와서는 뒤뜰에 호박, 상추, 깻잎, 고추, 부추를 심어 먹곤 했었다. 왕초보 농사인데도 어찌나 잘 나라주던지. 과연 미국이 비옥한 땅임을 매년 절감하곤 했었다.
그러나 욕심을 내어 심은 다른 채소와 과일 나무들은 아무리 물을 열심히 주어도 죽어버리고 시들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작은 실패의 경험들이 많은 교훈과 가르침으로 마음에 심겨졌었다.
마켓에서 몇 푼 안 되는 작은 돈으로, 그것도 싼값에 박스로 살 수 있는 흔한 과일들 때문에 남가주 사람들은 농부의 수고와 땀의 흔적을 거의 간과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다. 사과 한 알이 맛있는 맛으로 열리기까지는 수백번 수고의 손길이 거쳐져야 하고, 많은 시간을 인내로 기다려야 한다.
어디 사람의 수고뿐이랴? 때를 따라 적당한 비와 햇빛, 바람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이 다 갖춰져야 하나의 맛있는 사과를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귀한 열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맛있고 귀한 사과를 너무도 하찮게 여기고 함부로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과일뿐 아니라 싱싱한 채소가 우리 식탁에 올려지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많은 수고와 사랑의 섬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작은 농사의 경험을 하면서부터 음식에 대한 나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에 하찮게 여기던 음식찌꺼기들도 함부로 버리게 되지 않게 되었고, 아이들에게도 쌀 한 톨이 얼마나 귀하고, 과일 한 쪽이 얼마나 귀한지를 먹을 때마다 일러주려고 애를 쓴다. 배부르게 먹는 것보다, 적은 음식이라도 귀하게 여기며 감사하는 것이, 지금까지 애쓴 농부들과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지극히 마땅한 태도가 아닐까?
지금은 인내의 농사일보다는 인스턴트 음식으로 길들여진 시대라서 그 어느 때보다도 농부의 수고를 몇 푼의 돈으로 사려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그 작은 과일 하나에 스며있는 많은 사랑과 인내와 섬김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한층 더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농사를 지을 때 어느 것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물과 공기, 바람, 때에 맞는 이슬과 햇볕, 옥토밭, 그리고 좋은 열매를 위해서 때로는 잡초도 필요하다고 한다. 논 주위에 있는 잡초도 뽑아서 그 자리에 두면 비가 오더라도 미끄러지지 않고 다닐 수가 있기에 농부들은 하찮은 잡초도 농사 짓는 일에 요긴하게 쓴단다.
언젠가 주름 가득한 구릿빛 얼굴로 환히 웃는 농부의 웃음을 어느 사진전에서 봤다. 그 자연스럽고 순박한 기쁨 앞에서 온유함과 감사를 읽을 수 있었다.
또한 농사는 탁월한 융통성이 있다. 일손이 딸릴 때에는 내 일처럼 달려들어 높낮이 없이 어렵고 힘든 일을 나누어서 한다. 이익을 따지고 고집을 부려 때를 놓치면 그 해 농사는 다 망칠 수밖에 없고, 그럼 서로가 춥고 배고픈 겨울을 맞을 수밖에 없다.
우린 모두 농부로 살고 있다. 매일 가꾸고 심어야 할 보이지 않는 농작물이 우리 손에 맡겨져 있다. 그 복된 추수를 위해, 오늘 나는 어떤 것을 심고 있는가?

정 한 나 (세계선교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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