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승욱이 이야기 - 며느리 노릇

2007-09-22 (토)
크게 작게
나에겐 아버지가 두 분이 계시다. 한 분은 나를 낳아준 아버지시고, 한 분은 나를 자식으로 받아 준 아버지시다. 스물하고도 네 살때 난 시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섬기겠노라 하고 결혼을 했다.
시댁에 장조카와 거의 나이가 맞먹는 막내 며느리인 나를 너무 사랑하셨던 우리 시아버지. 집안 대소사가 있으면 조카들 틈에 끼어 우스갯소리를 하고 있는 나를 ‘철없는 저 것을 어쩌나’ 하고 바라보시던 나의 시아버지가 계시다.
우리 시댁은 친정과 다르게 유교 집안으로 일년에 몇 번의 제사가 있었다. 제사라는 것은 학교 다닐 때 가정시간에 그림에서나 보았던 것인데 시집을 가니 일년에 몇번식 제사상을 차려야 했었다.
난 제사음식을 만들면서 투털투덜 “아버님,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음식은 제사음식일 거예요. 여기다 마늘하고 파도 좀 팍팍 넣고, 깨소금도 좀 툴툴 뿌려 넣고, 맛있게 간도 맞춰서 먹으면 안되요? 이걸 어떻게 먹어요?” 아버님은 철없이 말하는 어린 며느리를 호통을 칠 수도 없고 괜히 옆에 앉아 밤을 까고 있는 우리 남편을 보고 “아범아, 밤을 왜 이리 못나게 깠냐. 뭐든 제사음식은 정성이 필요하다 으흠.” 그러면 남편은 나에게 “김민아, 너 조금 있다 나 좀 봐” 눈치 없는 나에게 남편은 언제나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타박의 연속이었다.
아버님에게 첫 아이를 가졌다고 전화를 드리니 남편의 눈이 작다고 예쁜 눈을 가진 애기 낳으라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잉어를 직접 잡아 손수 잉어탕을 끓여 서울로 부랴부랴 달려오신 아버님이셨다. 첫 아들을 낳았을 땐 새벽 차를 타고 서울에 오셔서 엄하기로 소문난 아버님 얼굴에 어찌나 웃음이 떠나질 않으셨던지. 집안 어른들에게 며느리 하나는 잘 얻었다고 언제나 자랑을 해 주셨던 나의 시아버지.
처음으로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러 간 날을 난 잊을 수 없다. 아무말 없이 나를 물끄러미 보고만 계셨고, 난 그런 아버님이 너무 어려워 좌불안석이었다. 불편하고 어색한 자리가 싫어서 난 우리 집 이야기도 하고 연애할 때 남편의 나쁜 버릇도 이야기하고 혼자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것을 끝까지 듣고만 계시더니 “많이 닮았구나, 참 많이 닮았네. 오래 전 이 세상 떠난 아범 엄마와 많이 닮았구나.” 그 다음은 가타부타 말씀 없이 며느리로 딱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아버님은 막내며느리인 내가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쳤던 그 며느리가 어느 날 승욱이를 낳은 것이다. 승욱이 때문에 아버님이 얼마나 상심을 하셨던지 “아가, 아무래도 시어머니 묘자리를 잘못써서 승욱이 눈이 그렇게 태어났나보다. 그때 너무 경황없이 시어머니가 죽는 바람에 그랬는데” 난 속으로 ‘아버님, 그게 아니예요. 누구의 잘못도 없는 거예요.’
승욱이를 낳은 후, 그렇게 밝고 명랑한 며느리의 기가 팍 죽었다. 왜 그리도 시댁식구들 얼굴 뵙기가 죄송스러웠는지 장애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7년 전, 승욱이의 눈수술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국을 떠나왔다. 아버님은 승욱이가 눈만 못 보는줄 아신다. 연로하신 연세이기 때문에 가족들이 승욱이가 귀도 듣지 못한다고 말씀을 드리지 말자고 했다.
7년간 한국을 떠나 온 후 며느리 노릇을 전혀 하지 못한 내가 한국을 가려고 준비하고 있다. 아버님이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은 내가 마음이 급해진 것이다. ‘아버님, 며느리노릇 할 시간을 주세요. 이건 너무 하잖아요.’

김 민 아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