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 하느님 모상

2007-07-2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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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갔던 인간이 화성, 목성 탐사까지 나서는 걸 보면 인간이 별것(?)인 것 같은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병원 동료가 밤사이에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아무도 예기치 못한 죽음이어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결국 인간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실은 가장 중요한 자기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인지조차 전혀 모른 체 살아간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이 개미에게도 큰 소리 칠 수도 없겠다. 서로 피차 내일을 모르고 살아가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개미의 차이는 오직 ‘영혼’에 달려 있다. 개미는 단지 감각으로 살아가지만 사람만은 감각 이외에 존재와 가치와 사고를 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있다. 사자와 고양이와 개나 원숭이가 달을 쳐다보며 지난날 잘못된 삶을 후회하며 가슴 아파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좀 더 가치 있는 보람된 삶을 살아갈 것인가 고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사자와 인간의 차이다. 개와 인간과 구별되는 이 차이가 바로 ‘영’의 존재 유무다.
인간이 원숭이와 달리, 꿈과 비전을 가지고 감각적인 삶에 의한 본능적인 삶의 차원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은 바로 이 ‘영’에서 나온다. 진화론자의 말처럼 인간이 원숭이에게서 진화된 것이라면, 인간보다 더 먼저 존재해온 원숭이가 아직도 다른 동물인 사자나 개나 여우같은 본능적 삶의 차원을 뛰어넘지 못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영은 감각이 훈련되어 경험화된 실체가 아니기에, 원숭이는 언제까지 원숭이처럼 살 수 밖에 없다. 영은 진화되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은 인간이 창조된 그 시초에 육과 함께 존재한 실체이지 진화되어 나온 것이 아니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어떤 생명체도 오랜 세월을 거쳐 영적 존재로 진화되어온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과학자가 아직도 인간이 원숭이와 같은 유인원에서 진화되어 왔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스스로가 영적 존재임을 부인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창세기’의 성경 말씀대로, 태초에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인 영적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기에 인간만이 영이신 하느님을 그래서 알아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수많은 피조물 중에서 인간만을 하느님처럼 ‘영적’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의미로 자신을 받아들일 때만, ‘하느님 모상’의 의미가 확실해진다.
그리고 그럴 때만 영과 영의 만남인, 창조주 하느님과 인간과의 ‘만남’이 구체화되어 온다. 사자와 개와 원숭이는 영적 존재가 아니기에 결코 영이신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고, 만날 수도 없다. 오직 영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만이 영이신 하느님을 인식하고, 만나고, 교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영을 담고 있는 육체는 마치 입고 있는 ‘옷‘에 비유할 수 있다. 오래 입으면 옷이 낡아 헌 옷이 되듯, 나이가 들면 육신도 볼품없이 늙어간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이신 하느님의 모상인 ‘영혼’은 그래서 영원히 존재하나, 입고 있는 옷과 같은 육신은 때가 되면 낡은 옷을 벗고 아름답고 빛나는 ‘새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게 된다.
영이신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될 천상영복을 생각하면,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고귀한 존재성 앞에 왜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지가 더욱 분명해진다.

김재동 <의사·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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