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 일상, 깨달음

2007-07-0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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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내가 좋아하는 박완서님의 ‘아주 오래된 농담’에 이런 글귀가 있다. “시간은 빨리 흐른다. 특히 행복한 시간은 아무도 붙잡을 새 없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요즘 들어 시간이 날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문득 멈춰 설 때가 많다. 인생을 논하기엔 아직 젊은 나이지만, 두세 달 지나면 대학 기숙사로 떠나가는 큰딸에게 미안해 마음이 무겁다.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 때문에 묵묵히 양보했던 큰딸이었기에 미안한 마음이 더해지는 것 같다. 특히 목회한다고 이것, 저것 빨리 어른이기를 요구했던 이기적인 엄마를 어른처럼 이해해 줬던 아이. 작은 목사로, 사모로 보여져야 했기에 흘렸던 그 아이의 눈물이 내 가슴속에 고여 있다.
시간은 되돌리기, 건너뛰기가 안 된다. 전진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한번에 열 계단씩 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공평하게 주어진 24시간을 분초마다 채워 가는 장거리 달리기가 인생이다.
얼마만큼 사느냐 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 게다가 살고 죽는 것조차 진정한 의미를 따진다면 비겁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의리를 지킨 아름다운 죽음 앞에 충신, 순교자란 명예로운 이름이 붙여지기도 한다.
어찌 나라의 운명만 이야기하랴. 매일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죽고 사는 문제로 씨름하지 않는가? 다듬어지지 않는 나의 고집과 혈기, 분노를 죽여야만 진정 아름다운 삶이 되어지는 법이다. 펄펄 살아있는 자아를 죽이지 못하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자아내며 스스로 외롭게 살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루를 채우느냐는 철저한 스스로의 몫이다.
결국 나 자신이 죽어야만 진정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일이 갈수록 어렵다는 사실이다. 내 힘만 가지고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아무도 못 말리는 고집쟁이가 될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위에 존경받는 어른들을 뵐 때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한결같이 고매한 성품과 겸손, 온유한 표정들에서 아름다운 향내가 나기 때문이다. ‘철든 인생’이란 무엇일까?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를 다스리는 하나님께 나의 부족한 것을 의뢰하는 믿음을 갖는 순간이 아닐까?
내가 하려고 할 때는 피곤하고 고단했는데 주님께 맡겼더니 마음이 평안해지고, 일의 결과와 상관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경험한다. 내가 부족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비례해서 커지고, 나를 포기할수록 설명할 수 없는 하늘의 은혜가 나를 이끌어 감을 발견하게 된다. 죽어야 사는 은혜! 이 또한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 오늘도 살려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 죽는 과정은 힘들지만 완전히 죽었을 때 다시 살려지는 기막힌 감격을 한번만 경험한다면 그 다음엔 신비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세상은 결국 내 손에 달려있다. 내가 죽어야만 살만한 세상이 되어지는 것이다. 상대방을 향하던 손가락을 펴서 가슴에 포개 놓고 기도한다면 세상 구석구석엔 황홀한 기쁨이 번져갈 것이다. 마음에 붙은 귓가에 손을 대고 가만히 들어보라. 나도 살고 상대방도 살려내는 진정한 ‘살림꾼’들의 합창소리가 들리질 않는가? “사랑만 하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라고.

정 한 나 (세계선교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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