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 바라보기 - 살아가면 고향

2007-06-0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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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부터 가게 친구(내가 부르는)를 사귀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며 내가 언제든 찾아가면 만날 수 있는 가게 친구를 사귀는 것을 좋아한다.
약속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들의 시간을 많이 빼앗지 않으며 가끔 들려 인사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친구가 되는 가게 친구. 게다가 그 친구들은 내게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 중에 한 친구가 내게 보여 준 내 가슴에 남아 맴도는 이야기 하나를 말하고 싶다.
그 친구는 우리 동네에 화방에서 일을 한다. 그는 그림을 그리며 그 곳에서 액자를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자세한 것은 묻지 않아 정확히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아직도 나는 잘 모른다.
그저 그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아이가 둘 있는 아빠라는 것과 만나면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그림 작업은 어떻게 되어 가는지와 가까운 곳에 전시회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냥 내가 그가 일하는 화방에 찾아가야만 볼 수 있는 그런 친구이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내게 큰 메시지를 준 적이 있다. 내 인생에 전환점이 되어 줄 만큼 큰 메시지.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에 그림 이야기와 미국에서 그림을 공부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의 그림이 궁금하다며 이메일로 각자의 그림을 볼 수 있는 홈페이지를 교환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그 당시 최근에 스탠포드 미대 대학원을 나왔으며 그 친구가 좋아하는 스탠포드 교수들을 내게 그림과 함께 소개해주었다.
그렇게 그를 만나 오래간만에 학교의 수업 이야기와 함께 현직 교수들의 그림을 구경하게 되었고, 그를 통하여 인근 활동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인터넷으로 편히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그림을 구경하던 중 그림 속에 그려있는 아주 낯익은 글씨를 발견하게 되었다. ‘살아가면 고향’ 한글이었다. 아주 정확한 한글이었다.
그의 생김과 억양은 전형적인 미국인이었기에 나는 한 번도 그가 한국말을 하거나 한글을 쓸 줄 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그림 중에 아주 또박또박 한글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너무 놀랍고, 반갑고, 그 다음은 한 참을 그 말뜻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다음 날 그를 찾아 가 물었다. 어떻게 한글을 알게 되었으며 어떤 뜻인 줄 알고 있느냐고. 그는 자기 친구 중에 한국 사람이 있었고, 그 친구를 통하여 안 글씨를 그림에 넣었다고 했다.
더 이상 묻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도 이 말 뜻을 한 번쯤은 깊이 생각했나 보다 하고 넘겨짚고 넘어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그가 그린 ‘살아가면 고향’을 생각했다.
살아가면 고향. 정말 맞는 말 같다. 그리고 내게 기운을 주는 말인 것 같다고 정말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며 걸었다. 그러며 걷고 있는 동안 내가 이 말을 되뇌는 동안 이 말이 가족과 떨어져 있어 늘 외롭다고 느끼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낯선 땅에 서 있다고 생각하던 내게 살아가면 고향이라는 말은 나에게 이곳도 너의 고향이라며 말 해 주는 것 같았고, 내가 태어난 나라를 마냥 그리워하던 마음을 조금은 위로해 주었다.
나는 그 이후로 종종 혼자 설거지를 하다가 아침저녁으로 창문을 열다가 세탁기 안에 빨래를 집어넣다가 조용히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 해본다.
살아가면 고향. 살아가면 고향.
정말 살아가면 고향인 것 같다. 이곳도 내가 오래 살았으니 고향인 것 같다.

김정연 <화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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