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동산 일기 ‘처갓집 뒷산에 봄은 오건만’

2007-04-0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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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병원 문을 나서며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해냈어 내가 이겨냈단 말이야 짜시야(짜식아)-”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은 채 한동안 떨어질 줄 몰랐다. 3개월에 걸친 항암치료를 마치고 수개월간 별도의 통원치료를 끝낸 친구는 의사로부터 임파선 암의 완쾌 진단을 받아낸 것이다. 이제는 쓰러진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면 되었다. 우린 며칠 뒤 중곡동에 사무실을 계약하고 바이어 라인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백화점 JC 페니와 체인 스토어인 AMC의 구매 대리점에서 가죽옷 주문이 붙었고 우리는 의정부와 동두천 권역에 있는 하청공장 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터졌다. 내수를 추진했던 지방의 백화점 대행업체로부터 행사 매장 납품대금으로 받은 어음이 부도가 난 것이다. 당좌수표와 어음의 매수는 늘어만 갔고 친구는 퇴근 뒤에 포장마차에 앉아 술을 마시며 심적 고통을 달랬다. 그렇게 몇 달을 전전긍긍하며 노력했으나 사업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시련은 그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임파선 암이 재발했답니다. 의사 선생님이 정밀 조직검사 결과를 집으로 알려왔어요” 며칠 뒤 전화선을 타고 부인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항암 치료가 다시 시작되었다. 머리가 빠지고 얼굴은 갈수록 창백해졌으며 체중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암세포가 급속히 전신에 전이되어 재생 불량성 골수암으로 발전했다는 의사의 사형 선고가 나의 가슴을 찍어 내렸다. 그는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었다. 가진 것이라곤 우정밖에 없던 초라한 내 모습.
녀석은 대범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나를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 급히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녀석은 나의 손을 잡고 침대 위에서 입을 막고 펑펑 울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널 편하게 보내지 못하는 나의 무력함을 용서해 다오.” 녀석은 피가 흥건한 가래를 토하며 말했다. “벽제 화장터에 깨끗이 태워서 내 어릴 때 살던 노량진 앞 한강물에 네가 뼈를 뿌려다오.”
남은 일주일을 녀석은 고통 속에서 그렇게 신음하면서 갔다. 그리고 벽제 화장터가 아닌 처갓집 뒷산에 묻혔다.
경기도 화성군 발안에서 서쪽 해변을 따라 난 작은 들섶 길 옆산. 아직 겨울의 냉기가 미처 가시지 않은 초봄 어느 날 녀석은 초등학생 아들의 완강한 만류 덕분에 미처 태워지지 못하고 흙속에 묻혔다. 마지막 흙을 관 위에 부으면서 나는 목이 터져라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용선아-”
김용선. 그는 서른 아홉해의 짧은 생을 굵게 살다 당당히 갔다. 항상 과묵하였으나 진실만을 말하였으며 의리와 가족애를 지켰던 녀석은 죽는 날까지 ‘가시고기’의 희생적 삶을 남겼다. 명절이면 생전에 웃음꽃 활짝 피던 처갓집 담장. 한식날(양력 4월6일) 아침, 장모님의 정성어린 황태국이 올려지고 명복을 비는 소리 산사에 들리면 이제는 청년이 되었을 네 아들은 네 놈이 좋아하던 ‘쏘주’ 한병 사들고 찾아올 게다.
처갓집 뒷산에 향불 올려지는 오늘. 타국에서 그려본다, 너의 얼굴을. 눈을 떠 하늘을 보아라- 짜시야! 새털구름이 떠가지 않느냐. 불러도 대답 없는 네 이름. 육신은 바람결에 흩어졌어도 호흡은 뒷산에 남아 있구나.
봄바람 맞으며 네 아들 경민이 큰 걸음으로 지금 너를 향해 오르고 있다. 환한 미소로 두 손 펼쳐 반기는 너의 모습이. 오오- 큰 바위 얼굴 되고 솔나무 되어 병풍처럼 그렇게 내려서고 있구나.
(213)590-5001
luxtrader@naver.com

김준하 <윈 부동산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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