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굵은 나이테 ‘두 군인의 이야기’

2006-09-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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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신문을 보다가 ‘이재현’이란 이가 쓴 ‘가상 대화 인터뷰’라는 글을 흥미진진하게 읽던 중 한 대목에 가서 머리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내가 알기에 이건 아닌데… 좀 삐딱하게 쓰는 것은 재미로 읽지만 진실을 왜곡하면 곤란하다.
‘박정희가 군인이 되기 위해 학교 선생 노릇을 때려치울 정도로 아주 집요했다’
이력서를 본 일은 없으나 아마 초등학교 교사를 짧게 하고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졸업을 하고 육군 중위가 되자 일본의 패전으로 귀국, 해방 후에도 줄곧 군에 있었고 결국 군을 동원하여 대권을 장악하고 18년간 독재를 했다.
큰 틀에서 보면 이상과 같으나 내가 보기에 그는 단순히 군인이 좋아서 시골에서 존경받는 선생 자리를 내던진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더 배워보려고 가난한 그로서는 공짜로 공부를 더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좋았다. 그런데 마침 군인의 길이 열렸으니 그 길이 장차 5,000년 이 나라 역사에 아무도 해결 못했던 ‘보리고개’를 몰아내는 길의 초입이었음을 본인도 몰랐으리라.
박 소년은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먹을 것을 축낼 입 하나가 늘어나는 것을 겁낸 어머니가 임신한 아기를 지우려고 한 되들이 간장병을 거꾸로 들이키고 사경을 헤맸다는 이야기는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
영특하게 잘 자란 그를 버려둘 수 없어 초등학교에는 간신히 보냈으나 집의 형편으로는 소작인으로 평생을 살아야할 박 소년을 학교에서 주선하여 관립사범학교의 ‘심상과’에 보냈다.
5년동안 학비 없이 고도의 훈련으로 못 하는 일이 없는 전천후 인물을 만들어내는 우수교사 양성소였다. 졸업하면 초등학교 교사를 2년동안 해야하는 의무가 있었다.
초등학교 선생이 된 박 청년은 주위를 둘러보고 여간해서 조선인은 교장 되기도 힘들다는 것을 눈치챘다. 의무기한인 2년만 하고 공부를 더 할 결심을 했다. 공짜로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만주군관학교’였다.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 성적이 우수하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이 가능하다고 돼있었다. 일본 육사는 최고의 엘리트를 키우는 ‘제국대학’을 제치고 진학하는 고등교육기관이어서 응모 조건이 아주 까다로웠는데 성적이 우수하면 편입할 수 있단다.
박 청년은 희망에 부풀었다. 육사를 나와 장교가 되면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게될 것이다. 일본인 청년들이 짹소리 못하고 경례를 붙이겠지. 죽을 곳에 가라고 해도 상관의 명령이면 간다. 조선인으로서 이보다 더한 출세길이 있을까? 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만주국 황제가 내리는 금시계를 받은 그는 일본 육사 57기로 편입되었다.
여기 전혀 다른 생각으로 일본 육사에 들어가서 군인이 된 분의 얘기를 써보자.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강 청년은 만주국 최고 명문인 ‘신경제일중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만주군관학교에 가겠다고 버티니 은행 두취였던 아버지는 다시는 안 본다고 크게 노하고 교제하던 여학생은 절교를 선언했다.
학교는 학교대로 동경제일고와 제국대학에 갈 재목으로 꼽고 있었는데 실망이 너무나 컸다. 친구들도 “우리가 너를 얼마나 부러워했는데 뭐가 아쉬워 그런 선택을 하느냐”고 야단들인데 그는 끝까지 굽히지 않는다. 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각본대로 만주국 황제가 하사하는 금시계를 받은 강 청년은 일본 육사 59기로 진학을 한다. 왜 그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군관학교를 택했을까? 그의 생각은 딴 곳에 가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꿈꾸고 체계있는 군사교육을 제대로 받아서 독립된 조국의 국방을 튼튼히 하는 기초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니 그 시대로서는 너무나 엉뚱하고 위험천만한 발상이었으니 감히 그 생각을 육친이나 애인에게조차 말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가슴에 품었던 그 어마어마한 꿈을 단 한사람, 신경제일중학때 좋은 친구였던 일본인 청년 이요리 마시도시에게만 속내를 털어놓았다 한다.
그가 한마디만 뻥긋한다면 당장 끌려가서 사형까지라도 갈 수 있는 대역죄인이 될 판인데 친구를 믿었다. 이요리 청년은 해방이 될 때까지 그 엄청난 비밀을 혼자 삭이고 있다가 고국으로 돌아갔다. 현재 동경에 살고 있는 이요리씨는 “지금까지도 그런 좋은 친구를 가졌던 것이 무한한 기쁨이며 동경제대로 가라고 말했던 내가 부끄러웠다”고 말하더란다.
이상은 6.25가 터지자 첫 번째 작전국장이었으며 초대 제2군사령관을 지낸 고 강문봉 박사의 얘기이다. 일본 육사를 나왔다고 덮어놓고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철부지 학자들에게는 이 57기 박정희 중위나 59기 강문봉 소위 이야기는 좋은 연구제목이 될 듯한데 어떠할런지…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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