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의 일기 승욱이 이야기

2006-09-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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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일기 승욱이 이야기

김민아

도망가기

요즘 들어 식탁에서 밥 먹는 일이 거의 없다. 엄마랑 대충 부엌 카운터 의자에 걸터앉아 밥을 먹는다. 여자 둘이 있는 집이니 그냥 편하게 일회용 반찬통에다 반찬 몇 가지에 끼니를 때우는 일이 잦다.
얼마 전부터 부엌이 좀 어두워졌다 느꼈는데 저녁밥을 먹으려 하니 앞에 놓인 콩나물무침 색깔이 영 희끄무레하다. 엄마가 얼마 전부터 형광등이 하나 꺼졌다고 형광등 하나 사오라는 생각이 번쩍 든다. 아직 세 개나 남아 있는 형광등으로 버티기에 들어갔었는데 드디어 하나도 아닌 두개가 동시에 꺼져버렸다. 하나 남은 형광등에 의지해서 밥을 먹고 있다.
‘흠… 저 형광등을 어떻게 갈아야 하지? 도대체 어떤 구조로 저 형광등이 저 판때기 안에 들어가 있는 거야?’ 콩나물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형광등 갈기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여러분~ 미국 집 형광등은 어떻게 갈아요?”라고 묻고 싶지만 도대체 인생을 여태껏 뭣하고 살았는지 한심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혼자 고심중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장실 변기 물도 숨이 콱 막힐 정도로 잘 내려가질 않는다. ‘우씨, 이건 또 어떻게 뚫어야하지?’ 저녁에 잘 때는 승욱이 때문에 계단 불을 항상 켜놓고 잔다. 애가 언제 없어질지 몰라서 어두우면 잘 찾지를 못하기에 언제나 불을 켜두고 살고 있다. 밤늦은 시간 계단 불을 켜려는데 불이 들어오질 않는다. ‘어~라? 저 높은 곳의 백열등은 어찌 갈라고!’
아… 대략난감이다. 아버지가 계실 땐 집에 뭐가 고장 나거나 문제가 생겨서 아침에 아버지 앞에서 지나가는 말로 뭐가 고장났다고 하면 어느새 고쳐 두셨지만 이젠 그렇게 고쳐주실 분이 안 계시니 모든 것이 나의 몫이다. 이럴 줄 알았음 배워둘 걸… 바보 바보, 이 멍청이… 어휴 속 터져…
엄마 앞에선 큰소리로 “저거 되게 쉬워. 형광등은 사다 갈면 되고, 변기는 뚫어 뻥~ 같은 거 사다 넣고 뚫으면 되고, 천장에 붙어있는 전구는 의자 받치고 올라가서 갈면 되고 그치? 오케이?”
저녁 퇴근길에 형광등이며 전구며 뚫어 뻥이며를 사고 집 앞에 버거킹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시 앉아 있다. 매일매일 다가오는 집안 일에, 아이들 양육문제, 회사 일에, 교회 일에, 개인적인 일에, 금전적일 일까지… 버겁다.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갑자기 무겁고 힘든 생각이 든다.
이 길로 차를 타고 10번 프리웨이 동쪽 끝으로 도망갈까, 5번 프리웨이 북쪽 끝으로 도망갈까? 어디로 도망가야 잘 갔다고 소문이 나지? 모든 것을 버리고 어디든 훌훌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것이 내 마음에 나쁜 것이 들어온 것 같다.
나약한 것 같으니라고, 미련한 것 같으니라고, 책임감 없는 것 같으니라고, 인간도 아니야 너는…이란 생각과 그래,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도망가, 어디든 떠나버려, 너 혼자 아무도 모르는데 가서 살아…라는 마음의 천사와 악마가 내 머리 윗 부분에서 싸우고 있다.
전화가 울린다 “너 어디야? 왜 아직도 안 와. 밥 안 먹고 기다리는데 빨리 들어와.” 엄마의 전화에 정신이 확 들면서 차의 시동을 켜 엄마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난 향했다.
사 가지고 온 형광등과 전구들을 척척 알아서 끼우고 변기도 뚫었다. 다시 부엌이 밝아지고, 계단도 환해지고, 변기 물도 속 시원히 쏴악 잘도 빠져나간다. 내 마음도 새로 끼운 형광등처럼 다시 밝아지고 뚫은 변기처럼 막힌 것이 뻥 뚫렸다.
‘야! 김민아~ 도망가긴 어딜 도망가. 할 수 있어.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너의 등뒤에서 널 도우시는 이를 바라보란 말이야. 알았지? 다시 한번만 도망갈 생각하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둬!!’ 이렇게 나에게 다짐하고 난 또 밤늦게까지 승욱이와 씨름을 한다.

<김 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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