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서른, 잔치는 시작됐다

2006-09-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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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시작됐다

프로는 아름답다고 했던가. 확실한 커리어와 세계관을 가지고 유쾌하면서도 활기차게 살아가는 30대 싱글녀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왼쪽부터 김미경, 조앤 이, 헬렌 김씨.

서른, 잔치는 시작됐다

30대 싱글녀의 사랑과 성공을 소재로 제작된 드라마 ‘섹스 앤 시티’의 주인공들. 전문직에 미혼인 이들의 소소한 일상은 20~30대 미혼여성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위풍당당 솔로 3인의 유쾌한 수다

프롤로그
정말로 행복해질까.
대학만 가면, 취직만 하면, 결혼만 하면, 집만 사면, 비즈니스만 성공하면,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지독히 많은 ‘~하면’이라는 자기 최면에 이끌려 지금껏 왔지만 목표를 달성한 순간의 성취감은 잠시 잠깐. 수초간의 행복(혹은 행복이라 믿고 싶은)이 지나면 다시 ‘~하면’의 숨가쁜 달리기가 시작된다.
그 인생의 수많은 ‘~하면’ 리스트 중 한국인들에게 유독 결혼은 한 인간의 인륜지 대사를 넘어 한 가족의 염원이며, 우리가 정해 놓은 사회라는 테두리 안으로 정식 입성하는 통행증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처녀·노총각은 반만년 한민족 역사에서 결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인류가 달나라를 정복하고도 반세기가 흐른 지금, 세상의 변화만큼이나 의식의 변화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인생이 뭐 별거 있냐’는 삼순이 아버지의 대사가 주는 진정성에 ‘내 행복’이 가장 중요한 21세기 신인류들에게 더 이상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아닌,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선택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특히 노총각보다 더 비극적인 어감을 풍겼던 노처녀들의 행보는 더 경쾌하고 발랄하다. 어려서부터 영민해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을 가진 ‘잘 나가는’ 한인 여성들이 늘면서 한인사회도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미란다, 사만다가 늘어만 가고 있다.
여전히 자신에게 궁금한 것이 많고, 해야 할 일들, 이뤄야 할 일들이 많은 유쾌, 상쾌, 통쾌한 30대 싱글녀들의 유쾌한 수다를 엿들었다.

자신의 일 즐기는 30대 싱글은 〃인생의 황금기〃
삶의 1순위는 ‘내 행복’


싱글녀 3인은 누구
◀ 김미경
HSPACE=5


1969년생. 1996년 스물 여섯 꽃다운 나이에 미국에 와 이듬해 미 육군에 지원 입대했다.
2001년까지 복무하고 제대, 칼스테이트 풀러튼에서 어카운팅을 전공, 한 학기에 30유닛씩 듣는 초인적인 스피드로 학부과정을 마쳤다. 현재 IRS 샌타애나 지부에서 세무감사관으로 맹활약 중이다.

◀ 조앤 이
HSPACE=5


1974년생으로 시카고에서 태어난 2세. 노스웨스턴 대학을 거쳐 조지 워싱턴 법대를 졸업했다. 법대 진학하면서부터 꿈인 아시안들과 이민자 등 소수계를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이민자들의 땅인 캘리포니아로 이주, 가뿐하게 가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뒤 1998년부터 LA법률보조 재단에서 가정법 전문 변호사로 상근중이다.


◀ 헬렌 김
HSPACE=5


1974년생. 7세 때 LA로 이민 왔다. UCLA에서 미술을 전공한 미술학도. 졸업 후 주류기업에서 일하다 우연히 한국에 갔다 본 속옷에 ‘꽂혀’4년 전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브랜드 ‘나너‘(nah-nuh)를 런칭했다. 인터넷 판매가 주사업인 그는 요즘은 나너 디자이너 겸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중이다.

<30대 싱글녀들의 유쾌한 수다를 엿듣다>

-왜 지금껏 결혼을 하지 않았나
▲조앤 이(이하 조앤): 학부 끝내고 법대 졸업하고 변호사 되어 몇 년 일하다 보니 서른이 훌쩍 넘더라고요. 그렇다고 부모님께서 결혼 성화를 하신 것도 아니고. 지금은 결혼할 친구가 있는데 둘 다 너무 바빠 결혼 날짜를 못 잡고 있어요.
▲헬렌 김(이하 헬렌): 어휴, 저는 부모님 압력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요. 게다가 만나는 어른들마다 언제 국수를 먹여줄 거냐며 성화도 하시죠. 그렇다고 결혼이 무슨 프로젝트 추진하듯 스케줄 짜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웃음). 현재 남자친구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결혼 이야기가 오고가는 사이는 아닙니다.
▲김미경(이하 미경): 제 경우는 결혼보다 일이 더 중요했던 거 같아요. 결혼 적령기에 결혼하자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때 결혼을 하면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지금도 당시의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미혼이라 불안한 점은 없는지
▲조앤: 일하는 게 좋아서 그런지, 그리고 현재의 라이프에 만족해서 그런지 불안한 점은 없습니다. 사실 사회적으로 보는 시각이 30대 싱글이지 20대의 나나 현재의 나나 크게 다른 점은 없으니까요.
▲헬렌: 결혼한 친구들의 애들이 커 가는 걸 보면서 나이 들면 출산도 육아도 힘에 부칠 것이라는 게 좀 걱정이 되긴 해요. 그러나 좋은 인연은 언젠가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해요. 상황에 떠밀려 결혼을 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과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경: 크리스마스나 땡스기빙처럼 가족이 함께 모여 지내는 시간이 될 때 결혼이라는 걸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 아, 그리고 아플 때 누군가 옆에 있으면 좋을 거 같고요(웃음).
-결혼에 대해 무조건 낭만적인 생각만을 할 나이는 아닐텐데 결혼에 대해 가장 두려운 점은
▲조앤: 법률재단에서 제 분야가 가정법이다 보니 정말 다양한 연령층의 다양한 결혼생활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가정폭력에서부터 외도 등 갖가지 결혼생활의 그늘을 보다보면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헬렌: 결혼한 친구들과 모여 이야기를 하다보면 뭐 물론 친구 앞이라 허물이 없어서 그렇겠지만 얼마나 남편이 연애시절과 다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까 연애시절 쿨하던 남편이 결혼과 동시에 전통적인 한국 남편들로 돌변한다는 거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으스스 해지는 거죠.
▲미경: 맞아요. 주변에서도 정말 그런 경우 많이 봤어요 
▲조앤: 그런데 그런 경우는 한인들뿐 아니라 타인종들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헬렌: 그리고 육아문제만 해도 그래요. 엄마들이 잠을 제대로 못 자더라고요. 전 정말 잠 못 자면 다음날 아무 것도 못하는데…(일동 웃음).
▲미경: 사실 나이가 드니까 간접경험이 엄청 많죠(웃음). 주변에서 보면 정말 왜 저러고 살까 싶은 커플들도 있고, 이혼하는 커플들도 적지 않고… 아는 게 병인 셈이죠(웃음).

출산, 육아 걱정등 ‘결혼의 그늘’에 회의감
혼자 즐기는 삶 터득, 나이 강박관념 없어져

-이제 결혼이야기는 그만하고 나이 드는 이야기를 해보죠. 20대 때와 확연히 다른 점은 뭔가요
▲조앤: 노는 게 쉽지 않다는 거죠(일동 웃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새벽까지 친구를 만나고 이야기를 해도 다음날 출근하는 게 쉬웠는데 이젠 절대로 못 그러죠(웃음).
▲미경: 맞아요. 결혼한 친구들이 애도 없겠다 남편도 없겠다 얼마나 자유롭게 놀 수 있냐고 말하지만 그것도 젊었을 때 이야기죠. 이젠 체력이 안 받쳐줘요(웃음).
▲헬렌: 그래도 좋은 점도 많아요. 나이 들수록 내가 어떤 그룹에 속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나 내 자신을 타인에게 어떤 형태로든 증명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없어져 참, 좋아요. 이젠 혼자서 레스토랑에 가서 밥 먹는 것도 안 창피하고 혼자서도 얼마든 잘 놀 수 있어 참 좋아요.
▲미경: 맞아요. 이젠 굳이 무리 지어 다니지 않아도 충분히 혼자 삶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 가는 나이인 거 같아요.
▲헬렌: 참 무엇보다 이젠 어렸을 때 남자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나 아닌 것들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사라졌어요. 이젠 있는 그대로의 날 사랑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있는 베짱이나 자신감도 생기고요.
-어떤 남자가 배우자로 좋은지
▲조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배우자를 조건 보며 고른다고 하는데 그래도 역시 날 가장 많이 사랑해 주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헬렌: 맞아요. 요즘 우리 또래 남자들 중에 하루 3끼 못 먹는 사람 없잖아요. 경제력보다는 인생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맘 맞는 동지를 찾아야 되겠죠.
▲미경: 사실 나이가 들수록 남자에 대한 결혼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는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이젠 혼자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조앤: 나이가 드니까 좋은 점 중 하나는 어렸을 때 가진 내 남편감은 이래야 한다는 기준이 사라진다는데 있어요. 결혼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화 속 왕자님을 찾는 기준은 사라지고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보는 눈이 생겨서 좋아요.
-30대 싱글녀로서 현재 가장 큰 고민은
▲헬렌: (한참을 생각하다) 음, 여드름요(일동 웃음). 그리고 늘어만 가는 주름도요. 사춘기 시절에도 안 났던 여드름이 막 목에 나고 이젠 주름도 막 보이기 시작해요. 정말로 늙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는 셈이죠.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더 나이 먹기 전에 정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더 늦기 전에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요즘 해요.
▲조앤: 이제쯤 제 인생의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대부분의 30대 싱글 여성들이 그렇겠지만 학교 졸업하고 나이가 들면 커리어가 어느새 10년 가까이 되거든요. 그러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것도 같고…. 어떤 변화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미경: 늘상 크고 작은 고민들이야 있죠. 그런데 나이 드는 게 좋은 게 그런 고민들에 대해 너무 심각하지 않게 내버려두는 법도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자신을 볶아봐야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돼서 그렇죠.
-더 늦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조앤: 한국에 다시 한번 가고 싶어요. 10년 전에 방문했었는데 다시 서울에 가서 한국말도 더 배우고 문화도 더 체험하고 싶어요.
▲헬렌: 지금껏 두려워하며 살았던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 스카이다이빙도 그렇고, 영어가 통하지 않는 도시에 가서도 살아보고 싶고…. 좀 삶을 제대로 살고 싶어요. 정말 이제는 내가 서 있는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것 같아요.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게 아니라 현재를 충분히 즐기고 싶어요. 그래서 나이 먹는 게 좋아요. 또 그래서 다시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요.
▲미경: 서른 일곱 해를 살면서 참 많은 걸 해봤죠. 군대에 있으면서 낙하산도 타봤고 대륙횡단도 했습니다. 신나게 참 많은 여행도 했죠. 딱히 하고 싶은 구체적인 일이 있다기보다 정말로 간절히 바라는 건 제대로 된 선교여행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거예요.

<글 이주현 기자·사진 진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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