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매킨리 등반기 <5>

2006-09-0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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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리 등반기 <5>

▲솔로 등반을 시도할 때는 갑자기 외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멀리 앞서서 등반하는 다른 팀만 보아도 위안이 된다.

매킨리 등반기 <5>

에델바이스 산악회 원정대 유재일 대원

눈 폭풍속 빙벽타고 단독등반 5시간반

이틀간 허송세월, 장비챙겨 하이캠프로
영하 40도 혹한, 고독과 고소증에 시달러

Day10 2006년 6월 4일
언제 바람이 불었는지 모를 정도로 고요하고 쾌청한 아침이다. 세상에서 제일 높고, 제일 아름다운 화장실에서 하얀 헌터봉과 포레이커 봉, 멀리 알래스카 산맥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무아지경에 빠진다.
춥지만 않으면 몇 시간이고 있고 싶은 곳이다. 텐트로 오는 길에 레인저 오피스에 들러서 오늘 날씨를 보니 바람이 20~25마일이고 기온도 적당해 정상 등정을 하기에 알맞은 좋은 날씨였지만, 백 대장이 오늘을 휴식일로 정하였기에, 모두들 아침 늦게 기상하여 고소 증세를 예방해 주는 다이아막스(Diamox)를 먹고 우리는 오랜만에 낮잠을 즐긴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Day11 2006년 6월 5일
오늘도 날씨는 좋았으나 오후에는 바람이 높아진다는 일기예보로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헤드 월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있었고, 우리 뒤쪽 텐트의 체코슬로바키아 팀은 어제 웨스트 림(West Rim)으로 해서 정상을 다녀왔다며 자랑이 한창이다.
어제와 똑같이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을 게 아닌가 하고 걱정도 된다. 브라이언이 유치하지만 재미있는 놀이를 하자며 배낭에서 화투를 꺼낸다. 우리는 화투를 가지고 섰다를 했다. 놀이에서 진 내가 탈키티나에서 햄버거를 사기로 하였다. 텐트 속에서의 생활이 지루하고 답답해진다. 내일은 날씨가 좋아지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Day12 2006년 6월 6일
밤새도록 내린 눈으로 매킨리시티는 온통 하얗게 변해 있다. 흐린 날씨로 오늘도 이 곳에서 무료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10시쯤 사람들이 헤드 월로 오르는 것을 보며, 이렇게 무작정 완벽한 날씨를 기다리다가 하이 캠프도 못 올라가 보고 되돌아가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된다.
브라이언은 오늘도 화투판을 벌인다. 어제 저녁 체했다며 배 아파 하던 백 대장도 오늘은 괜찮다며 핼쑥한 얼굴로 판에 끼어든다. 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화투판에 끼기가 싫어, 나는 빠진다며 잠을 청해 보다 레인저 오피스를 가서 보니 오늘은 35~45마일, 내일은 30~40마일로 바람이 분다는 일기예보다.
텐트로 돌아와 혼자서라도 하이 캠프로 올라가 그 곳 사정을 알아보아야겠다며 백 대장에게 의논을 하니 올라가 보라고 한다. 2시간 후 크레바스 빙탑, 3시간 후 헤드 월 위에서, 5시간 후에는 하이 캠프에서 교신을 하자며, 일인용 텐트와 버너, 코펠과 무전기 등, 등반장비를 챙겨서 일행들의 배웅을 받으며 매킨리시티를 출발한다.(13:00) 혼자 솔로로 하는 등반이라 내 페이스대로 천천히 쉬지 않고 오른다.
내 예상대로 두 시간 후에(15:00) 크레바스 빙탑에 도착 교신을 한 후, 깎아지른 빙벽의 헤드 월 상단을 주마를 사용해 한 시간 후에 도착,(16:03) 식량을 데포한 지점에 이르러 다시 교신을 한 후, 약간의 식량을 챙겨서 웨스트 버트리스(West Butress) 절벽 능선 길을 올랐다. 헤드 월서부터는 암벽 설사면 능선으로 위험하기가 그지없었다. 칼날 같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라지는 레인저들이 설치해 놓은 고정 로프가 세 군데나 설치돼 있었고, 양쪽은 아찔한 절벽의 암벽 설 능으로 마치 험준한 유럽의 알프스를 등반하는 것 같았다.
때론 거센 바람이 신설과 함께 차디찬 눈보라를 몰고 와 숨 호흡을 하는 사이 폐 깊숙이 까지 차가운 기온이 전달된다. 아무도 없는 무서운 칼날 같은 설릉 위를 희박한 공기 속의 거센 바람을 헤치며 트레킹 폴과 아이섹스로 중심을 잡아가며 하이 캠프 쪽으로 차근차근 이동을 해가니 체력 소모가 만만치 않음을 느낀다.
짧은 리지 구간인 절벽을 통과할 때는 앞에서 올라가고 있는 팀이 보여서(17:20) 반갑고 고마웠다. 너무나도 위험한, 양쪽 절벽의 고도감이 아찔한 좁은 설릉과 리지 구간을 지나 하이 캠프에 도착을 했다.(18:36) 하이 캠프에는 생각보다 적은 팀들이 있었다. 텐트가 모두 여덟 동으로 그나마 레인저 텐트 세 동을 빼면 겨우 다섯 동뿐이었다.
다음에 올라올 일행들을 위해서 넓은 캠프 사이트를 잡아 한쪽 구석에 눈을 다지고 보금자리를 만든다. 바람이 워낙 강해서 텐트 치기가 어려웠지만 내가 많이 사용했던 1인용 텐트라 무난히 칠 수가 있었다. 나는 텐트 안으로 들어가서 버너를 피우고 눈을 퍼서 물을 만들고 언 몸을 녹이며 주변을 정리하고 무전기를 꺼내 매킨리시티와 교신을 하며 하이 캠프의 상황과, 헤드 월에서 이 곳으로 오는 험한 리지에 대해서 알려 주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내일을 위해서 일찍 슬리핑백 속으로 들어가 누워본다.
이 곳까지 오는 도중에는 너무나 위험한 구간이라 고소증세를 느끼지 못했었는데 슬슬 기분 나쁜 고소증세가 나타났다. 머리는 아프지 않았지만, 폐에 습기가 있는지 잦은 기침과 몸의 끝 부분인 손가락과 발가락이 전기고문을 받는 것처럼 저려온다.
다이아막스를 먹어 보지만 전기고문을 하는 듯한 짜릿짜릿한 기분 나쁨은 가시지를 않는다. 세상에 산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가져간 옷들을 전부 껴입고 침낭 속에 누워 있어도 차가워지는 밤이다.

Day13 2006년 6월 7일
침낭 속을 파고드는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밤새 윙윙 울어대는 매킨리의 성난 숨결을 들으며 몸을 잔뜩 웅크리며 새우잠을 잦다. 시간은 왜 그리 더디게 가는지 밤은 왜 그리 긴지 지겨웠다. 하이 캠프는 텐트를 날려보낼 듯한 거센 바람과 함께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은비늘의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밤새 잦은 기침과 전기고문을 당하는 듯한 고소증에 시달렸다.
9시에 무전 교신을 하고 너무 추워서 하루 종일 밖으로 나가지를 못한다. 영하 40도쯤 되나 아무도 밖으로 나오는 사람도 없다. 저 아래로 내려가면 대원들과 따뜻한 텐트에 편안히 있을 수가 있는데… 이런 생각만으로도 육체적인 피로감보다 정신적인 피로감이 먼저 찾아왔다. 하이 캠프에서 느낀 고독이다. 알 수 없는 긴장과 더불어 두렵고 외로웠다. 이런 저런 잡생각들이 시간을 그토록 더디게 가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했다. 높은 곳에 오르면 알 수 없는 세상이 보이기라도 하나 나는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 베이스캠프의 따뜻한 커피가 생각이 난다. 무전 약속을 한 오후 6시에 베이스캠프를 불러보지만 무전 교신이 안 된다.
대원들의 목소리라도 들었으면 한결 덜 추웠을 텐데… 섭섭한 마음이 든다. 내 주변은 차갑고 쌩쌩 소리내어 울부짖는 바람소리뿐 나를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HSPACE=5

▶높은 바람으로 등반이 연기됐다. 화투를 가지고 섰다를 치면서 허송세월을 보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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