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크리스천 생각 좋은 설교

2006-07-2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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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찾는 이들의 좋은 교회의 기준은 “목사님의 설교가 좋은가”가 대부분이다. 그 교회가 속한 교단의 신학과 교회의 전통보다는 교회를 인도하는 목사의 인격이 교회를 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우리 실정이다.
그러나 그 ‘좋은 설교’가 포용적인가 폐쇄적인가는 고려할 것을 귄하고 싶다. 요즘에는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설교를 통해 다른 종교, 다른 교단, 다른 교파를 비방, 비하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부정적 가르침에서 영적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다. 폐쇄적이고 부정적 가르침은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나는 지금의 중동의 불안정의 이유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에도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 문제는 아랍사회 안에 있다고 본다.
9.11 이후 서방 국가들이 사우디 교육청에서 발행하는 교과서가 너무 폐쇄적이라고 항의를 하자 사우디 교육청에서는 교과서를 개편한 것을 크게 내세웠다. 그러나 개편된 교과서도 다분히 폐쇄적이다. 1학년 교과서에는 “이슬람 외의 다른 종교는 다 거짓 종교다”라는 부분이 있다. 4학년: “불신자를 미워하되 불의롭게 대해서는 안 된다” 5학년: “무슬림은 하나님과 예언자를 믿지 않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어서는 안된다” 8학년: “유대인은 원숭이이고 크리스천은 돼지이다”(이상 2006년 5월21일자 워싱턴포스트 참조) 개편된 내용이 이렇다면 그전 것은 얼마나 심했을까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 폐쇄적 교과서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9.11의 테러리스트 19명중 15명으로 자라났다.
그렇게 자란 사람들이어서 비뚤어진 신앙을 쉽사리 받아들이는 것일까? 이슬람에서는 자살을 금하는데도 자폭 테러리스트는 자살자가 아니라 순교자여서 천당에서 70 처녀를 상으로 받는다는 억지를 그대로 믿는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토마스 프리드먼은 이슬람의 지도자들이 폐쇄적인 나머지 모두 각각이고 서로간에 대화가 없다고 한다. 즉 이슬람에는 제2 바티칸공의회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1962년부터 4년간에 걸친 제2 바티칸공의회에는 2천여명의 가톨릭 지도자들이 모여 변천하는 세계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의논했다. 여기에는 정교회와 개신교의 대표들도 참관인으로 초청되었다.
그 결과 가톨릭 교회는 그전과는 아주 다른 20세기의 교회로 탈바꿈을 했다. 지금의 가톨릭 교회는 중세기에 면죄부를 팔고 성주의 어린 아들을 그 지방의 주교로 임명했던 부패했던 교회가 아니다. 신학도 전통적 신학에서 학구적 신학으로 발전했다.(그런데 아직도 가톨릭이 이단이라는 목사가 있다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미국은 군인 수만명을 전지로 보내는 것보다 이슬람세계에 이슬람 신학교를 세워 학구적 신학 체제를 갖도록 하고 이슬람 공의회를 갖게끔 주선하는 것이 훨씬 돈과 시간과 생명을 아끼는 길일 것이다. 영향력 있는 이슬람 지도자 중 자폭 테러리스트가 죽어 본능적 만족을 상으로 받는다는 주장이 틀렸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아직 하나도 없다. 그것이 코란적이냐 아니냐를 이슬람 지도자들이 공의회에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고 결과를 발표하면 자폭자는 확 줄고 세상은 많이 좋아질 것 같다.
한국교회의 실정은 잘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다행히 개신교의 주류 교단들이 거의 다 포용적이다. 그러나 교단의 성격이 어떻든 교인들에게 직접 영향을 주는 사람은 아무래도 매주일 설교를 하는 목사이다. 아직도 폐쇄적 설교를 하는 목사가 있다고 하면 그것을 ‘좋은 설교’라고 평하는 신도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김 영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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