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용성 선사의 유언

2006-06-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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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정월, 만해 스님은 백용성 선사를 찾아와 오산학교의 남강 선생을 만날 것을 요청했다. 선사는 이를 흔쾌히 수락하여 대좌가 이뤄졌고 이는 천도교, 불교, 기독교 대표 서른세명이 뜻을 모은 3.1 운동이라는 민족의 대역사를 의논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들 중 모질고 거센 이민족의 채찍과 당근 앞에 생을 마치도록 지조를 지킨 이는 슬프게도 용성 선사를 포함하여 단 몇 사람뿐이었고, 나머지는 결국 민족 반역자, 일제의 협력자가 되거나 가까스로 소극적 방관자로서의 구차한 생을 마쳤으니, 후세의 사표가 될 선각자를 애써 찾아 실으려는 해방된 나라의 교과서 편수자들을 아연케 하였다.
1864년 전라도 장수에서 태어난 용성 선사는 열네살에 출가한 이래 광복을 몇 해 앞 둔 1940년 고난의 생을 마칠 때까지, 일제 및 일본 불교와의 타협을 끝끝내 거부하고 불굴의 정신으로 민족의 독립과 한국 불교의 중흥 및 대중화에 매진하여 크나큰 공적을 쌓았는데, 우리 민족은 그를 기억하는가, 불자들은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 때나 지금이나 부처님, 예수님의 가르침이란 남보다 더 넓게 보고 더 깊이 알고 깨달아 민중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어 이들의 상처를 보살피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몸소 실천함이 그 요체일진대, 길거리의 청년 아이도 알 수 있는 도도한 시대 정신의 흐름조차 보지 못하고 좁아 터진 제 울타리에 스스로 갇혀 혼자만의 정신적 안락만 추구하거나 그럴듯한 명분론으로 현실과 타협하여 대의를 저버린 종교인이 많았던 것은 불교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용성 선사는 민족 정체성의 고수와 불교의 대중화, 토착화를 위해서는 우리말로 된 불경이 중요함을 일찌감치 깨달으시고 화엄경을 비롯한 많은 한문 경전들을 우리말로 번역하셨으며, 왕생가, 대각가, 권세가 등 여러 편의 불가를 우리말로 지어 퍼뜨렸지만, 그 당시 고매한 수행과 정진으로 한 소식들 하여 덕망이 높으시다던 대선사들조차 불경을 쉬운 우리말로 번역해 놓으면 아무나 제 멋대로 해석하여 불법이 어지러워진다며 이를 못마땅히 여기고 꾸짖으니 모두들 덩달아 이를 비웃고 해코지하였는데 이는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있었던 얘기가 아니다.
선사는 처음으로 손수 찬불가를 지어 풍금에 맞추어 법회 때 신도들과 함께 불렀는데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냐며 안팎의 소란함이 대단했다. 부녀자를 포함한 일반 신도들에게 처음으로 사찰에서 참선 지도를 하거나 신도들의 집에서 구역 법회를 열었는데, 근기도 볼 줄 모르고 아무에게나 불교의 진수를 맛보인다며 큰일 날 짓을 한다고 야단들이었다.
어린이 포교의 중요성을 깨달아 어린이 법회를 열었으며 이에 힘쓰지 않으면 조만간 불교는 대가 끊길 거라고 하였는데 지금 한국과 미주의 절간에는 아이들 소리, 청소년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그쳤는가.
일제의 앞잡이들에게 절도 빼앗기고 신도가 어렵사리 내어준 어두운 방 한 구석에서 밤새워 번역에 몰두하며 혼자서 노심초사하던 용성 선사는 쓸쓸히 생을 마치시며 마지막 순간에 유언하시되, 우리말 불경 백만권을 펴내어 백만 불자를 만들라고 하셨는데, 이 유언은 지켜졌는가, 아직도 유언으로 남아 있는가.

이 원 익
<태고사를 돕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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