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윤실 호루라기 스스로 속이지 말라

2006-05-2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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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전세계적으로 기독교 안팎이 떠들썩하다. 얼마 전 ‘유다복음’이 발견됐다고 하더니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화한 ‘다 빈치 코드’의 상영을 놓고 국내외 교계 안팎이 소란스럽다.
복음 방송을 통해 미국 기독교 보수 진영을 진두 지휘해온 제임스 답슨 박사는 그의 프로그램인 ‘포커스 온 더 패밀리’(Focus on the Family)에서 아예 자녀들에게 ‘다 빈치 코드’를 보여주지 말라고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영화라는 총체적 매체를 통한 불가항력적인 위력의 파장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한편 다소 진보적인 교회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자며, 비신자들이 기독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활용하자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교인들에게 스타벅스 상품권을 제공하여 비신자들과 커피 한 잔의 대화 가운데 진정한 예수는 누구인가를 토론할 기회를 갖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한국 기독교계가 영화 상영금지를 법원에 신청하고 나서자 한 쪽에서는 한국이 신정국가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여기서 몇몇 몰지각한 사람들은 물이 물고기를 만난 듯 아예 예수와 기독교를 한꺼번에 폄하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 즉 “예수의 거추장스러운 옷인 ‘신성’을 걷어내고 기독교의 교리나 신조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2006년 4월19일 세계일보 ‘종교 춘추’칼럼)는 주장과 함께 ‘성역’깨기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와 같은 ‘소란스러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니라 종교 혹은 신앙의 문제를 현대 디지털 문화의 한 코드-일명 ‘다 빈치 코드’-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괴리적 현상일 뿐이다. 즉 신앙이나 신조의 논지를 자의적인 문화적 해석에 연관하거나 의존하려는 과정에서 이미 방향성(orientation)을 상실했을 때 울리는 변죽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영화 ‘다 빈치 코드’ 때문에 더 이상 기독교의 위기감을 논하는 것은 마치 위조지폐 때문에 진짜 화폐를 의심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초래할 뿐이다. 위폐의 유통으로 진폐의 존재가 부정될 수 없듯이, 제 아무리 디지털 문화의 유통자들이 자기들만의 ‘코드’로 예수를 음해해도 우리 신앙의 핵심인 예수의 존재가 위축될 리 없다.
역사상 한 순간도 예수에 대한 음해나 음모가 멈춘 적은 없다. 예수 탄생 당시 헤롯 왕의 영아학살(infanticide)로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기까지의 숱한 음모는 물론, 예수 부활을 감추기 위한 기득권의 총체적 음해와 음모는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때마다 이러한 소란함 속에서 느끼는 우리의 두려움은 어쩌면 예수 부활 후 빈 무덤 앞에서 느끼던 여인들의 모습과 닮았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누가복음 24장 5절)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빈 무덤’이 아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 찾고 있는’ 우리의 어설픈 신앙이다. 아니 우리 안에 어설프게 자리잡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하나님과 영생에 대한 온전치 못한 믿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권면처럼, 스스로 속이지 않는 한 아무도 우리를 속일 수 없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7-8)

홍 영 화 교수
(UC 리버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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